"누가 어떤 근대 국가를 꿈꾸었는가? 그들의 길은 왜 모두 실패하였는가?"
개항 이후 20년, 조선의 사회 곳곳에서 "이 나라는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분출했다. 누구는 일본을 따라 위로부터 급진적 개혁을, 누구는 농민의 손으로 아래로부터 혁명을, 누구는 황제를 정점으로 한 근대 입헌 군주국을 꿈꿨다.
이 단원에서는 1882년 임오군란부터 1899년 대한국 국제까지, 근대 국가 수립을 향한 다섯 갈래 길을 살펴본다. 급진 개화파(갑신정변), 동학 농민군(동학 농민 운동), 갑오·을미개혁(관 주도 개혁), 시민 단체(독립협회), 황실 주도(대한제국·광무개혁) — 모두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서로 다른 방향을 향했다.
이 모든 시도는 결과적으로 국권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실패의 역사만이 아니다. 이 시기는 우리 근대 정치사상의 실험실이었으며,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 공화국의 사상적 뿌리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 근대 국가 수립의 네 갈래 — 그러나 모두가 실패했다
개항 이후 정부는 신식 군대 별기군을 창설하고 통리기무아문을 두어 개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는 구식 군인의 불만과 외세 의존의 심화라는 부작용을 낳았다.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은 그 모순이 폭발한 사건이다.
고종은 1880년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해 개화 정책을 총괄케 하고, 1881년 별기군(신식 군대)을 창설하며 일본인 교관을 초빙했다. 같은 해 일본에는 조사 시찰단(신사유람단)을, 청에는 영선사(김윤식 인솔)를 파견해 근대 문물을 학습하게 했다. 미국에는 1883년 보빙사(민영익·홍영식)를 보냈다.
그러나 이 모든 개화 정책에 대해 보수적 유생들은 위정척사 운동으로 맞섰다.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1881), 홍재학의 만언척사소(1881) 등 척사 상소가 잇따랐다. 이만손은 황쭌셴의 『조선책략』(러시아를 막기 위해 친중·결일·연미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력히 비판했다.
별기군에는 신식 무기와 좋은 대우가 돌아갔지만, 구식 군인들은 13개월간 봉급(쌀)을 받지 못했다. 1882년 6월 마침내 지급된 쌀에는 모래와 겨가 섞여 있었다. 분노한 구식 군인들은 봉기하여 민겸호의 집을 습격하고 일본 공사관을 불태웠다(별기군 일본 교관 호리모토 살해). 봉기는 도시 빈민과 결합해 확대되었고, 명성황후는 충주로 피신했다.
봉기 후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다시 불러들였다. 대원군은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5군영을 복구하는 등 개혁 이전으로 되돌리려 했다. 그러나 청군 4,500명이 출병해 한 달 만에 봉기를 진압하고,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 갔다(1882.7). 이로써 청의 본격적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 — 위안스카이(원세개)가 조선에 주둔하며 외교·재정·군사를 통제했다.
임오군란은 두 개의 후폭풍을 낳았다. ① 일본은 제물포 조약(1882.7)으로 배상금과 일본 공사관 호위 병력 주둔권을 얻었다. ② 청은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8)으로 종주권을 명문화하고 청 상인의 내륙 통상권을 확보했다. 외세 양자의 동시 침투가 본격화된 것이다.
임오군란을 거치며 개화파는 두 갈래로 갈라졌다. 온건 개화파(김홍집·김윤식·어윤중)는 청의 양무 운동 모델을 따라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다. 반면 급진 개화파(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급진적 개혁을 도모했다. 이들의 대립이 곧 갑신정변으로 폭발한다.
청·프랑스 전쟁(1884)으로 청군의 절반이 조선에서 빠져나가자, 급진 개화파는 일본 공사 다케조에의 군사 지원 약속을 받고 거사를 결심했다.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켜 민씨 정권의 주요 인사를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튿날 14개조 정강을 발표하며 새 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정변은 3일 만에 무너졌다. 청군 1,500명이 즉시 개입했고, 일본 공사관 군대는 약속을 어기고 철수했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홍영식은 살해당했다. 갑신정변 이후 일본과는 한성 조약(1885, 배상금·공사관 신축 부지), 청·일 간에는 톈진 조약(1885, 양국 동시 철병·재출병 시 통보)이 체결되었다. 톈진 조약은 후일 청일전쟁의 발화점이 된다.
갑신정변에 대한 평가는 한국 근대사 평가의 시금석이다.
① 긍정론: 청 종주권 부정·신분제 폐지·입헌 체제·근대적 재정 등 14개조의 강령은 한국 근대 정치 개혁의 시발점이다. 갑신정변이 없었다면 갑오개혁도 없었을 것이며, 일본 메이지 유신과 견줄 만한 근대화 청사진이었다.
② 부정론: ㄱ) 외세 의존 — 일본 공사의 군사 지원에 의존한 사대성. ㄴ) 대중적 기반의 결여 — 농민·일반 백성의 지지 없이 청년 엘리트 수십 명만의 거사. ㄷ) 토지 문제 외면 — 14개조에 토지 재분배가 없어, 농민 부담 경감의 실질적 방안이 빈약했다. ㄹ) 김옥균 일행이 다케조에의 약속만 믿고 거사를 강행한 무모함.
오늘날 학계의 다수 견해는 두 시각을 종합한다 — 강령은 진보적이었으나 방법은 한계가 분명했다. 즉, "위로부터의 급진 개혁이 외세 의존과 대중 단절 속에서 어떻게 좌초하는가"를 보여 준 한국 근대사의 결정적 교훈이다. 신채호는 갑신정변을 "3일 천하"라 비판하면서도, 한국 근대사의 '첫 번째 시도'로서의 의미는 인정했다.
갑신정변이 위로부터의 실험이었다면, 1894년의 동학 농민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분출이었다. 농민·백성이 주체가 되어 봉건 모순(폐정)과 외세 침탈(반외세)에 동시에 맞선 한국 근대사 최대의 민중 운동이다.
동학(東學)은 1860년 경주의 최제우가 창시했다. 서학(천주교)에 대응한다는 의미에서 동학이라 명명했고,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의 평등 사상과 "보국안민(輔國安民)·후천개벽(後天開闢)"의 변혁 사상을 결합했다. 1864년 최제우는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로 처형되었지만, 2대 교주 최시형은 비밀리에 교세를 확장했다.
1892~93년 동학교도들은 교조 신원 운동(공주·삼례 집회 → 서울 복합 상소 → 보은 집회)을 통해 단순한 종교 활동을 넘어 정치적 결집체로 성장했다. 보은 집회(1893)에는 2만 명이 모여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외쳤다 — 동학은 이미 반외세 정치 운동의 성격을 갖춰 가고 있었다.
1894년 1월,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만석보 강제 수세 등)에 분노한 농민들이 전봉준의 지도 아래 봉기했다(고부 봉기). 정부가 안핵사 이용태를 보냈으나 그가 농민을 더욱 탄압하자, 3월 전봉준·손화중·김개남이 무장에서 창의문을 발표하며 본격 봉기에 나섰다(1차 봉기, 반봉건).
농민군은 백산에 집결(전라도 일대 1만여 명)해 농민군 조직을 정비하고, 황토현(4월 7일)·황룡촌 전투(4월 23일)에서 관군을 격파했다.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했다. 위기에 몰린 정부가 청에 출병을 요청하자,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도 동시 출병했다.
외세 개입을 막기 위해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 화약(5월 8일)을 체결하고 자진 해산했다. 농민군은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해 자치적으로 폐정 개혁을 실시했다.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칠반천인의 대우를 개선하며, 청상과부의 개가를 허용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한다"는 12개조 폐정 개혁안의 정신이 곧 집강소 자치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고 6월 21일 경복궁을 점령(갑오변란)하여 친일 정권을 세우고 청군을 공격하니, 이것이 청일 전쟁의 시작이다. 일본의 침략이 명백해지자 농민군은 9월 다시 일어났다(2차 봉기, 반외세). 전봉준의 남접과 손병희·최시형의 북접이 논산에서 연합했고, 약 20만 명이 서울을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11월 9~14일 우금치 전투(공주)에서 일본군과 관군 연합의 신식 무기 앞에 농민군은 궤멸했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1895년 3월 처형되었다.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했지만, 그 정신은 의병 운동과 활빈당, 그리고 3·1 운동으로 이어졌다.
역사 용어가 그 평가를 가장 잘 보여 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동학란(東學亂)"이라 불렸다. 광복 후 한동안 "동학혁명"이라 했고, 오늘날 학계는 "동학 농민 운동" 또는 "동학 농민 혁명"이라 부른다.
① '난'으로 보는 시각: 결국 좌절했고, 정권을 잡지 못했으며, 종교적·신비주의적 요소가 많았다. 일제와 보수 사학의 시각이다.
② '혁명'으로 보는 시각: 반봉건·반외세의 종합적 강령, 농민의 광범위한 결집, 집강소 자치 등 근대 지향성을 들어 '미완의 혁명'이라 본다.
2004년 「동학 농민 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며 '혁명'이라는 공식 명칭이 부여되었다. 오늘날 학계는 그 정치적·사상적 의의를 한국 근대 민중사의 출발점으로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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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와중에 일본의 압력 아래 단행된 일련의 개혁(갑오 1차·2차, 을미)은 근대 국가의 외형을 갖추는 결정적 작업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일본의 침투와 강요라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경복궁 점령 후 일본은 김홍집을 영의정으로 한 친일 내각을 세우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해 개혁을 강행했다. 군국기무처는 약 5개월간 약 200건의 안건을 의결하며 다음과 같은 개혁을 단행했다.
일본은 군국기무처가 너무 자율적이라 보고 폐지하고, 박영효를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세웠다. 1895년 1월 고종은 종묘에 나아가 홍범 14조를 반포했다 — 한국 최초의 근대적 헌법적 문서로 평가된다.
2차 개혁의 주요 내용은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8아문→7부), 사법권을 독립시켜 재판소 설치, 지방을 8도→23부 337군으로 개편, 교육 입국 조서 반포(1895.2)로 한성사범학교 설립, 단발령 직전에 무관학교·외국어학교 설립 등이다.
러시아의 압력으로 일본이 랴오둥 반도를 반환(삼국 간섭, 1895.4)하자, 명성황후는 친러 정책으로 일본을 견제하려 했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는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자객을 침투시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을미사변). 일국의 왕비를 시해한 이 사건은 국제적 충격을 줬지만, 일본은 가해자들을 형식적으로만 처벌하고 끝냈다.
김홍집을 다시 세운 친일 내각은 곧 을미개혁(1895.10~1896.2)을 단행했다. '건양(建陽)' 연호 사용, 태양력 채택, 종두법 시행, 우편 사무 시작, 소학교 설립 등은 진전이었지만, 단발령(1895.11)은 폭발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의 유교 윤리에 정면 충돌한 것이다.
단발령과 을미사변에 분노한 유생들은 전국에서 봉기했다(을미의병). 유인석·이소응·허위 등이 의병을 이끌었다. 이때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으니, 이것이 아관파천이다. 친일 내각은 무너졌고, 김홍집은 길거리에서 격살되었다.
갑오·을미개혁은 한국 사회의 근대적 외형을 만든 결정적 사건이다.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도량형 통일, 사법권 독립, 태양력 채택 등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일부 강령은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군의 폐정 개혁안을 흡수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계 또한 분명하다. ① 일본의 강요로 진행되어 자주성이 결여되었다. ② 토지 개혁이 빠져 농민 부담은 줄지 않았다. ③ 근대 군대 창설이 미흡해 국방 능력 강화로 이어지지 못했다. 즉, "근대화의 외형과 식민화의 길이 동시에 진행"된 모순이 갑오·을미개혁의 본질이다.
아관파천 후 조선의 근대 국가 수립은 두 갈래로 전개되었다. 아래로부터의 시민 단체(독립협회)와 위로부터의 황권 강화(대한제국). 두 모델은 1898년 만민공동회에서 잠시 결합했다가, 결국 서로 충돌하며 좌초했다.
갑신정변에 가담했다가 미국으로 망명했던 서재필이 1895년 말 귀국했다. 그는 1896년 4월 7일 한글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7월에는 정부 관료·지식인을 결집해 독립협회를 결성했다. 1896년 11월에는 청 사신을 맞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1897 완공).
독립협회는 처음에는 관료·지식인의 사교 단체였으나, 1898년부터 대중 정치 운동 단체로 발전했다.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해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하고 한러 은행을 폐쇄시켰다. 외세 이권 침탈에 시민이 직접 맞선 첫 사례였다.
고종은 처음에는 헌의 6조를 받아들이고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여 의관 50명(절반을 독립협회가 추천)을 두기로 했다. 그러나 보수파는 독립협회가 '공화정'을 노린다는 익명서를 뿌렸고, 고종은 1898년 11월 4일 독립협회 간부 17명을 체포했다. 시민은 만민공동회를 계속 열어 저항했으나, 정부는 황국협회(보부상 단체)를 동원해 시민을 폭력 진압했고, 12월 25일 독립협회는 강제 해산되었다.
아관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고종은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했다. 그해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圜丘壇)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연호는 광무(光武)로 정했다.
광무개혁은 '구본신참(舊本新參)'(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고함)을 기치로, 황권을 강화하면서 근대화를 추진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무개혁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양전·지계 사업은 근대적 소유권의 기초가 되었고, 황실 주도의 식산흥업으로 약 30여 개의 회사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① 황실에 재정이 집중되어 국가 재정의 통합이 안 되었고, ② 군대 양성이 충분치 못했으며, ③ 무엇보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로 대한제국의 모든 노력이 일본의 침투 앞에 무력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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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5월 전주 화약 이후, 농민군은 전라도 53개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치적으로 폐정 개혁을 실시했다. 그 강령으로 전해지는 「폐정 개혁 12조」는 동학 농민 운동의 사회 개혁 청사진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1. 동학교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모두 씻고 모든 행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일일이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불태운다(燒却奴婢文書).
6. 칠반천인(七般賤人)의 대우를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쓴 평량갓을 벗긴다.
7. 청상과부의 개가(改嫁)를 허락한다.
8. 무명의 잡세는 모두 폐지한다.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와 내통하는 자는 엄징한다(嚴懲倭通者).
11. 공·사채는 일체 무효로 한다.
12. 토지는 평균하여 나누어 경작한다(平均分作)."
— 오지영, 『동학사(東學史)』(1940) 수록
이 12조는 ① 신분제 폐지(5·6·7·9조), ② 농민 경제 보호(8·11·12조), ③ 반외세(10조)의 종합적 강령이다. 특히 12조의 "토지 평균 분작"은 갑신정변 14개조에서 빠진 토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것으로, 갑오개혁이 외면한 농민 부담 문제를 가장 근본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다만 오지영의 『동학사』가 1940년 저작이라 12조 전체의 사료적 신빙성에 대해서는 학계의 검증이 진행 중이다.
| 연도 | 사건 | 주체 | 의의·한계 |
|---|---|---|---|
| 1882 | 임오군란 | 구식 군인·도시 빈민 | 청 내정 간섭 본격화 |
| 1884 | 갑신정변 | 급진 개화파 | 최초의 위로부터 근대 개혁, 외세 의존·3일 실패 |
| 1894 | 동학 농민 운동 | 농민·동학교도 | 아래로부터의 반봉건·반외세, 우금치 좌절 |
| 1894.7~12 | 1차 갑오개혁 | 군국기무처(친일 내각) | 신분제 폐지·과거 폐지, 일본 강요 |
| 1895.1 | 홍범 14조 | 김홍집·박영효 내각 | 한국 최초 헌법적 문서 |
| 1895.10 | 을미사변 | 일본 | 명성황후 시해, 국제적 충격 |
| 1895.11 | 을미개혁(단발령) | 친일 내각 | 태양력·연호 사용, 단발령 반발 |
| 1896.2 | 아관파천 | 고종 | 러 공사관 피신, 자주성 훼손 |
| 1896~98 | 독립협회 | 서재필·시민 | 독립신문·만민공동회·헌의 6조 |
| 1897.10 | 대한제국 선포 | 고종(황제) | 환구단 즉위·연호 광무 |
| 1899.8 | 대한국 국제 | 황실 | 전제 군주제 명문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