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이 켜진 서울 거리에서, 한 시대가 무너지고 또 한 시대가 자라났다."
개항으로 외국 상품과 자본이 밀려들면서 조선의 경제 구조는 격변했다. 농민은 곡물 유출에 시달렸고 상인은 외국 상인과 경쟁해야 했다. 동시에 전등·전차·전화·신문·학교 같은 새로운 문물이 도시 거리를 바꾸어 놓았다.
이 단원에서는 개항 이후 한국 사회·경제의 변화와 문화의 변동을 살펴본다. 핵심은 두 가지다 — ① 외세의 경제 침탈과 그에 대한 한국인의 경제적 저항(방곡령·상회사·국채보상운동), ② 서구 문물의 도입과 그것이 만든 새로운 일상(전차·신문·학교·종교).
이 시기의 변화는 이중적이다. 문명의 진보를 가져다 준 같은 손이 침탈의 폭력을 휘둘렀다. 전차는 편리했지만 일본 자본이 깔았고, 학교는 새 시대를 열었지만 선교사가 세웠다. 근대화와 식민화의 이중주 — 이것이 개화기 한국의 본질이다.
▲ 개화기 사회·경제의 네 흐름 — 침탈과 저항, 변화의 이중주
개항으로 시작된 무역은 조선의 경제 구조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처음에는 일본 상인의 단독 무대였지만, 점차 청·서양 상인이 가세해 국제 자본의 각축장이 되어 갔다.
1876년 부산 개항을 시작으로 원산(1880)·인천(1883)이 차례 개항되었다. 초기 일본 상인은 중계 무역의 형태를 띠었다 — 영국산 면제품을 들여와 조선의 곡물과 교환하는 '미면(米綿) 교환 경제'가 형성되었다. 무관세·일본 화폐 통용권의 특혜를 누린 일본 상인은 폭리를 취했다.
특히 일본의 곡물 수입은 농민에게 직격탄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후 산업화로 식량이 부족했고, 조선의 쌀·콩을 대량 수입해 갔다. 그 결과 조선 내 미가가 폭등하고, 농민은 굶주리는 역설이 발생했다. 함경도 관찰사 조병식이 1889년 방곡령(防穀令)을 내려 곡물 유출을 막으려 했으나, 일본은 통상장정의 "1개월 전 통보" 규정 위반을 빌미로 배상금을 받아냈다(11만 엔, 1893).
1882년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으로 청 상인이 한성·내륙으로 진출하면서, 임오군란 이후 청·일 두 나라가 조선 시장을 두고 격렬한 경쟁을 벌였다. 1880년대 후반 한 통계에 따르면 조선의 수입품 중 일본 상인 거래가 60%, 청 상인 거래가 35% 정도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자, 일본 상인이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게 되었다.
외국 상인의 내륙 진출로 전통 시장도 흔들렸다. 객주·여각 등 한국 상인의 입지가 좁아졌고, 일부는 황국중앙총상회(1898)와 상회사 설립 운동으로 자구책을 모색했다. 한성에는 대동상회·장통상회 등 근대적 상회가 설립되었고, 1899년 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되어 민족 자본의 거점이 되었다.
대한제국 시기 광무양전 사업(1898~1904)은 양안(量案)을 새로 만들고 토지 소유자에게 지계(地契)를 발급해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하려 한 시도였다. 양지아문(1898)과 지계아문(1901)이 이를 담당했고, 약 36%의 토지에 대해 양전을 완료했다.
그러나 광무양전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확인하기보다 국가 재정 확충(과세 기반 확립)이 주된 목적이었다. 지주의 토지 집중을 막지 못했고, 소작농의 부담은 줄지 않았다. 게다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사업은 중단되었다.
1905년 일본은 재정 고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郎)를 파견해 화폐 정리 사업을 단행했다. 백동화·엽전 등 기존 한국 화폐를 일본 제일은행권으로 교환하는 사업이었지만, 그 실체는 한국 화폐 가치를 일방적으로 절하하는 약탈이었다.
화폐 정리 사업으로 한국 상공인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고, 이로 인한 자금 부족과 차관 도입 압력은 결국 국채보상운동의 직접적 배경이 된다.
외세의 경제 침탈에 한국인은 침묵하지 않았다. 농민은 방곡령으로, 상인은 상회사 설립으로, 시민은 국채보상운동으로 맞섰다. 그 절정이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이었다.
1890년대부터 한국 상공인들은 근대적 상회사(會社)를 설립해 외국 자본에 맞섰다. 대동상회(1883, 평양), 장통상회(한성), 대조선저마제사회사(1897) 등이 대표적이다. 1898년에는 한성의 상인들이 황국중앙총상회를 결성해 외국 상인의 점포 침투에 조직적으로 대응했다.
1899년에는 황실 자본을 바탕으로 대한천일은행이 설립되어, 한국 최초의 민족 은행이 되었다. 같은 시기 한성전기회사(1898, 황실·미국 합작), 한성은행 등이 잇따라 설립되어 산업 자본의 토대를 만들려 했다.
1904년 한일 의정서, 1905년 을사늑약을 거치며 일본은 한국에 거액의 차관을 강요했다. 1907년 초까지 그 액수는 약 1,300만 원에 달했다 — 당시 한국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천문학적 금액이었다. 일본의 의도는 명확했다 — '경제적 식민화'로 한국을 옭아매려는 것이었다.
1907년 2월, 대구의 출판업자 서상돈과 김광제가 대구 광문사에서 회의를 열고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했다. "남자는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국채를 갚자"는 단연(斷煙)의 호소였다. 이 소식은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 등 모든 신문에 보도되어 들불처럼 번졌다.
한성에서는 양기탁·베델(어니스트 베델)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조직해 모금을 주도했다. 부녀자들은 패물폐지부인회·탈환회 등을 만들어 비녀·가락지를 모았고, 기생들은 대구의 기생 단체(국채보상의무금 수합 부인회)를 결성했다. 농민·일꾼·심지어 거지까지 참여했다. 약 4개월간 모금된 액수는 약 19만 원에 달했다.
그러나 통감부는 운동을 분쇄하려 들었다. 1908년 통감부는 모금 횡령 혐의로 양기탁을 구속(무죄로 풀려남)하고, 베델을 영국 법정에 세웠다. 모금된 돈은 일본의 차관 상환에 사용되지 못한 채 흩어졌고, 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 정신은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으로 다시 살아났다.
국채보상운동은 한국 근대 민족 운동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 그러나 그 성격에 대해서는 두 시각이 공존한다.
①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 운동의 주도층은 출판업자·언론인·지식인이었으며, 운동의 호소도 '동포의 각성'을 호소하는 계몽적 어조였다. 즉, 위에서 아래로 향한 계몽적 운동이라는 평가이다.
② 자발적 시민 운동으로 보는 시각: 운동은 발의되자마자 전국·전 계층의 자발적 참여로 폭발했다. 부녀자·기생·머슴까지 참여한 사실은 단순한 '계몽 수용'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한국 사회에 이미 형성된 민족 의식과 시민 의식의 발현이라는 평가이다.
2017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며 그 역사적 의의가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학계는 두 시각의 통합으로 — "계몽 운동이 자발적 시민 운동으로 전환한 결정적 사례"로 평가한다.
참여 지역·계층을 클릭하면 자세한 데이터가 나옵니다
개항 이후 30여 년 동안 서울 거리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바뀌었다. 전등이 켜지고, 전차가 달리고, 전화선이 깔리고, 기차가 부산까지 닿았다. 일상의 풍경이 송두리째 바뀐 시대였다.
전등이 먼저 들어왔다. 1887년 3월 6일 경복궁 건청궁에 한국 최초의 전등이 켜졌다. 미국 에디슨 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했고, "조선이 미국 최초의 전등 수출 시장"이라 할 정도였다. 1894년에는 정전(停電)이 잦아 "건달불"이라 놀림받기도 했다.
전차는 1899년 5월 17일 동대문~서대문 노선이 개통되었다. 한성전기회사(콜브란·보스트윅과 황실 합작)가 건설했다. 초기에는 "쇠를 먹는 괴물"이라 무서워하다가도 곧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1900년 종로~용산 노선이 개통되며 한성 교통이 본격 변화했다.
전화는 1896년 궁중에 처음 설치되었고, 1902년 한성과 인천 사이에 일반인용 전화 서비스가 개통되었다. 이 시기 우편 사무도 본격화되어, 우정총국(1884, 갑신정변으로 중단)을 거쳐 1895년 우체사가 복구되었다. 1900년에는 만국우편연합에 가입했다.
철도는 가장 야심찬 근대 인프라였지만, 동시에 가장 노골적인 침투의 도구이기도 했다. 경인선(서울~인천)이 1899년 9월 18일 개통되어 한국 최초의 철도가 되었다. 미국인 모스가 부설권을 받았다가 일본에 양도한 것이었다.
이어 경부선(1905, 서울~부산)·경의선(1906, 서울~신의주)이 차례 개통되었다. 이 두 노선은 모두 러일전쟁 와중에 일본 군용으로 부설된 것으로, 토지 강제 수용·노동력 강제 동원 등 한국인에게 막대한 피해를 줬다. 부설된 후에는 일본의 대륙 침략의 군용 동맥으로 활용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자상을 입은 민영익을 미국 선교사 의사 알렌(H. N. Allen)이 살려냈다. 이 인연으로 고종은 1885년 4월 10일 광혜원(廣惠院)을 개원해 알렌에게 맡겼다 — 한국 최초의 근대 서양식 병원이다. 보름 만에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되었고, 1904년 미국 사업가 세브란스의 기부로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전했다.
같은 시기 천연두 예방을 위한 종두법이 보급되었다(지석영, 1885년 본격 시행). 1899년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광제원·대한의원을 설립해 국립 의료 체계를 정비하려 했지만, 통감부 설치 후 일본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근대 학교와 신문은 단순한 정보 기관이 아니라, '국민'을 양성하는 공장이었다. 누가 어떤 학교를 세우고 어떤 신문을 발행했는지를 보면, 그 시대 누가 어떤 한국을 그렸는지가 보인다.
한국 근대 학교는 세 갈래에서 시작되었다.
① 민간 학교: 원산학사(1883)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사립학교이다. 함경도 원산의 덕원부 관민이 자발적으로 설립금을 모아 세웠다 — 즉, 한국인의 자발적 근대 교육 의지의 표현이었다.
② 정부 학교: 동문학(同文學)(1883)에 이어 육영공원(1886)이 설립되었다. 미국인 헐버트·길모어 등을 교사로 초빙해 영어·근대 학문을 가르쳤다. 양반 자제 35명이 입학했으며, 한국 최초의 근대적 관학(官學)이었다. 갑오개혁 후 1895년 교육 입국 조서가 반포되며 한성사범학교·한성중학교·외국어학교 등 본격적 근대 학제가 정비되었다.
③ 선교사 학교: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배재학당을, 스크랜튼 부인이 1886년 이화학당을 세웠다.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으로, 후일 유관순 등이 이곳에서 공부했다. 이외 경신학교(언더우드, 1885)·정신여학교(엘러스, 1887)·숭실학당(베어드, 1897) 등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근대 신문은 갑신정변 직전인 1883년부터 시작되었다.
① 한성순보(1883~1884): 박문국이 발행한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 박영효의 건의로 발간되었으며, 한문 전용이었다. 10일에 한 번 발행되었지만, 갑신정변으로 박문국이 불타며 폐간되었다. 후속으로 한성주보(1886, 한문·한글 혼용)가 발간되었다.
② 독립신문(1896~1899): 서재필이 창간한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 신문. 한글판 3면·영문판 1면으로 발행되었다. 화요·목요·토요 격일로 나오다가 일간으로 발전했다. 독립협회의 기관지 역할도 했다.
③ 황성신문(1898~1910): 남궁억·장지연 등이 창간. 국한문 혼용. 유학자 출신 지식인의 계몽 운동을 대변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논설로 유명하다.
④ 제국신문(1898~1910): 이종일이 창간. 한글 전용. 부녀자·서민층을 주된 독자로 했으며, 여성 계몽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⑤ 대한매일신보(1904~1910): 영국인 베델(어니스트 베델)이 발행인을 맡고 양기탁이 주필이었다. 영국인 명의라 일본 통감부의 검열을 피할 수 있어, 가장 강력한 반일 언론이 되었다. 신민회와 깊이 연계되어 국채보상운동을 주도적으로 보도했다.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의 가르침을 이은 손병희가 1905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며 근대 종교로 발전했다. 이용구의 일진회 같은 친일 분파가 나오는 한계가 있었지만, 천도교는 1919년 3·1 운동의 주축 종교가 된다.
개신교는 1884년 알렌, 1885년 아펜젤러·언더우드 등이 들어오며 본격 확산되었다. 학교·병원·교회를 통한 사회 사업이 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천주교는 1886년 조프 조약으로 포교의 자유를 얻어 다시 활성화되었다.
국문 연구도 본격화되었다. 주시경이 한글의 체계화와 보급에 앞장섰고, 1907년 학부 안에 국문연구소가 설치되어 한글 표기법을 정비했다. 지석영의 「자전석요」(1909) 같은 사전도 편찬되었다. 신소설(이인직 『혈의 누』 1906, 이해조)·번역 문학(『철세계』·『걸리버 여행기』)이 등장하며 근대 문학의 길을 열었다.
개화기 서구 문물 도입에 대한 평가는 한국 근대화 평가의 핵심 쟁점이다.
① 긍정론: 전등·전차·철도·학교·신문·병원 등 새로운 인프라는 한국 사회를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특히 한글 신문과 근대 학교는 '한국인'이라는 근대적 정체성을 만드는 데 결정적이었다.
② 비판론: 서구 문물의 도입은 결국 외세 자본·외세 종교·외세 권력이 들여온 것이었다. 철도는 군용 동맥이었고, 학교는 선교의 도구였으며, 병원은 외국인의 사업이었다. 자율적 근대화가 아닌 '외부 이식'의 한계가 분명하다.
③ '다중적 근대성' 시각: 최근 학계는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 서구 문물이 도입되는 과정에서 한국인이 그것을 선별·번역·전유한 측면에 주목한다. 한글 신문은 서구 인쇄술을 한글로 전유했고, 원산학사는 민간이 자발적으로 신식 교육을 만들었다. 즉, 단순한 '수동적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 재구성의 측면이 있었다는 평가이다.
핫스팟을 클릭해 한성 곳곳의 신문물을 탐색해 보세요
서구 문물과 경제 침탈이 동시에 진행된 시대 — 그 모순의 사료들을 읽어보자.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된 직후,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1905년 11월 20일자에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이 날에 목 놓아 통곡한다)」을 발표하여 조약의 부당함을 격렬히 규탄했다.
"지난번 이등(伊藤, 이토 히로부미) 후작이 한국에 왔을 때,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 동양 평화를 유지하리라고 어리석게 믿었더라. ⋯ 아! 4천 년의 강토와 5백 년의 사직(社稷)을 다른 사람에게 진상하고, 2천만 생령(生靈)을 다른 사람의 노예가 되게 하였으니, ⋯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단군과 기자 이래 사천 년 국민 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망하고 그칠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
이 날을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으랴(是日也放聲大哭)."
— 장지연, 「시일야방성대곡」, 황성신문 1905년 11월 20일자
이 사설로 황성신문은 일제에 의해 정간되었고, 장지연은 체포·구금되었다. 그러나 이 사설은 한국 근대 언론사의 가장 유명한 글이 되었고, "동포여! 동포여!"라는 호명은 한국인의 집합적 자각을 일깨우는 결정적 외침이 되었다. 우리가 오늘날 신문이 '여론'을 만든다고 할 때, 그 효시를 보여 주는 사건이다. 다만 장지연은 후일 친일 행위로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라, 글의 가치와 인물 평가는 별개로 살펴봐야 한다.
| 분야 | 주요 사건·시설 | 의의 / 한계 |
|---|---|---|
| 경제 침탈 | 강화도 조약 부속 통상장정(1876)·청일 상인 경쟁·방곡령(1889)·화폐 정리(1905) | 일본 자본의 종속 강화 |
| 경제 저항 | 방곡령·황국중앙총상회(1898)·상회사·대한천일은행(1899)·국채보상운동(1907) | 시민·민간의 자발적 결집 |
| 근대 인프라 | 전등(1887)·전화(1896)·전차(1899)·경인선(1899)·경부선(1905) | 일상 변화 / 군용 침투 양면 |
| 근대 의료 | 광혜원·제중원(1885)→세브란스(1904)·종두법(지석영)·광제원·대한의원 | 국립 의료의 시작 |
| 근대 교육 | 원산학사(1883)·육영공원(1886)·배재(1885)·이화(1886)·한성사범(1895)·대성·오산(1907) | 근대적 시민 양성 |
| 근대 언론 | 한성순보(1883)·독립신문(1896)·황성·제국(1898)·대한매일신보(1904) | 여론 형성·민족 의식 결집 |
| 종교·문화 | 천도교(1905, 손병희)·개신교·천주교·국문연구소(1907)·신소설 | 근대적 정체성 형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