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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한사1-03-01

개항과 불평등 조약 체제

"500년 동안 닫혔던 문이 열렸을 때, 조선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영역 1866 ~ 1882 병인양요 · 강화도조약 · 조미수호
VISUAL JOURNEY · 개항의 풍경

사진으로 미리 보는 개항기

척화비
척화비 · 대원군 통상수교거부의 상징
아편 전쟁
아편 전쟁(1840) · 동아시아 질서 균열
페리 흑선
페리의 흑선(1853) · 일본 개항 강요
신미양요 어재연 장군기
신미양요(1871) · 어재연 장군기(수자기) — 미군에 노획
아편전쟁 함대
함포 외교 · 19세기 서세동점의 무력

들어가며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오랜 조공·책봉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국 함대의 포격으로 청이 무릎을 꿇고(아편 전쟁, 1840), 페리 함대의 출현으로 일본이 막부를 무너뜨렸다(메이지 유신, 1868). 그 거대한 파도는 마침내 한반도에까지 닿았다.

이 단원에서는 조선의 개항이 단순한 항구의 개방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거대한 전환이었음을 살펴본다.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잇따른 서양 열강과의 조약 — 이 모든 사건은 한반도가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에서 근대적 조약 체제로 강제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개항은 누구에게는 '개화'였고 누구에게는 '치욕'이었으며, 누구에게는 '굴종'이었다. 이 단원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 조선의 개항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외세의 폭압과 내부의 준비 부족이 어떻게 교차했고, 그 결과 어떤 불평등의 사슬이 만들어졌는가?

1
통상수교거부
병인·신미양요 격퇴 · 척화비
2
무력 개항
운요호 → 강화도 조약(1876)
3
조약 체제 확립
조미·조청·조영·조독·조러
4
불평등의 사슬
치외법권 · 최혜국 · 무관세

개항기의 네 단계 — 통상 거부 → 무력 개항 → 조약 확산 → 주권 잠금

척화비
척화비(斥和碑). 흥선대원군이 신미양요 직후 전국 200여 곳에 세운 비석. "양이가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매국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 새겨, 통상수교거부의 의지를 천명했다.
출처 · 보물 · Wikimedia Commons (PD)

흔들리는 동아시아 — 국제 질서의 변동

조선의 개항을 이해하려면 먼저 19세기 동아시아 전체의 풍경을 보아야 한다. 천하의 중심은 더 이상 베이징이 아니었다. 산업 혁명을 마친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청 — 아편 전쟁과 난징 조약

영국은 청과의 무역 적자를 메우려고 인도산 아편을 청에 밀수출하였다. 청의 임칙서가 아편을 몰수·소각하자 영국은 이를 빌미로 함대를 파견했고, 압도적 화력 앞에 청은 패배하였다(아편 전쟁, 1840~1842). 그 결과 체결된 난징 조약(1842)은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사료 · 난징 조약(1842)
"제2조. 영국 신민이 화물 매매와 무역을 위하여 광저우·아모이·푸저우·닝보·상하이의 다섯 항구에 가서 거주하고 무역하는 것을 청은 허용한다. ⋯ 제5조. 청은 종래의 공행(公行) 무역 제도를 폐지한다. ⋯ 제6조. 청은 영국에 홍콩섬을 양도한다."
— 「난징 조약」(1842년 8월)
읽기 포인트 — 다섯 항구의 강제 개항, 공행(특허 상인 조합) 폐지, 홍콩 할양은 청의 천하 중심 질서를 무너뜨린 사건이었다. 이듬해 후속 조약(후먼 조약, 1843)에서는 영사재판권·최혜국대우·관세 협정권까지 빼앗겼다. 이것이 곧 불평등 조약의 원형이다.

아편 전쟁의 충격은 청 지식인들의 자기 인식을 흔들었다. 위원의 『해국도지』(1842), 서계여의 『영환지략』(1848) 같은 책이 출간되어 서양의 실체를 알리려 했고, 이는 조선의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 통상 개화론자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

일본 — 페리 내항과 메이지 유신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증기 함대)을 이끌고 에도만에 나타났다. 막부는 다음 해 미일 화친 조약(1854), 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불평등 조약)을 맺고 개항하였다. 무능한 막부 정권에 분노한 하급 사무라이들이 천황 중심의 새 정부를 수립하니, 이것이 메이지 유신(1868)이다.

새로 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기치 아래 서양식 군대·산업·교육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당한 불평등 조약을 그대로 조선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제국이 되려는 자, 먼저 식민을 만드는 법 — 이것이 1870년대 일본의 논리였다.

아편전쟁 장면
아편 전쟁(1840~42). 영국 군함이 청의 군함을 격파하는 장면. 산업 혁명을 마친 서양과 전통 동아시아의 군사력 격차가 극명하게 드러난 전쟁이었다.
출처 · Edward Duncan 작 · Wikimedia (PD)
페리 함대
페리의 흑선(黒船). 1853년 페리의 미 동인도 함대가 에도 만에 출현. 일본인은 이를 '검은 배'라 불렀으며, 일본 개국과 메이지 유신의 단초가 되었다.
출처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 Wikimedia (PD)
DEEP DIVE · 학계의 쟁점
왜 동아시아는 서양 앞에 무너졌는가?

16세기까지 동서양의 경제력 격차는 크지 않았다. 일부 연구자들은 1800년경 중국의 GDP가 서유럽 전체와 비등했다고 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세 나라(청·일본·조선)는 모두 서양의 압력에 굴복했다. 왜인가?

산업 혁명의 격차: 증기 기관·강철 함포·전신은 군사력의 차원을 바꾸어 놓았다. ② 국가 체제의 차이: 서양의 근대 국민 국가는 동아시아의 전통 왕조보다 효율적인 동원 능력을 가졌다. ③ 중화 질서의 자만: 청은 자국이 세계의 중심이라 믿었기에 외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위로부터의 혁명'을 가능케 한 사무라이 계층의 결집, 막부와 번(藩)의 경쟁 구조, 페리 내항의 '비교적 평화적' 충격 — 여러 요인이 겹쳤다. 조선은 이 모델을 의식했지만, 자신의 조건에 맞게 변용하는 데 실패했다.

흥선대원군과 통상수교거부정책

1863년, 12살의 어린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섭정에 올랐다. 그는 60년 세도 정치의 적폐를 청산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거세지는 서양의 통상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대원군의 내정 개혁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외척 세도가를 축출하고, 비변사를 사실상 폐지하여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복구했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고, 환곡의 폐단을 막기 위해 사창제를 도입했다. 사림 정치의 거점이 되어 폐단을 일으키던 서원 600여 곳을 47개로 정리하는 강수도 두었다.

한편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했는데(1865~1872),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하려고 원납전을 강요하고 당백전이라는 악화를 발행해 백성의 원성을 샀다. 즉, 대원군의 개혁은 왕권 강화민생 부담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양면적 성격을 가졌다.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1866년 초,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 신자 8,000여 명을 처형하였다(병인박해). 이를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니, 이것이 병인양요(1866)이다. 한성근(문수산성)과 양헌수(정족산성)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은 물러갔지만, 외규장각 도서 약 300권을 약탈해 갔다.

같은 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에게 격침되었다(1866). 5년 뒤 미국은 이를 빌미로 함대를 파견했다(신미양요, 1871). 광성보 전투에서 어재연 부대가 결사 항전 끝에 거의 전멸했지만, 미군 역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사료 · 척화비문(1871)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 「척화비(斥和碑)」(1871) 비문
읽기 포인트 — 두 차례의 양요를 격퇴한 대원군은 전국 200여 곳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문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대원군 정권의 정치적 정통성을 외세 격퇴에서 찾고자 한 선언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변화하는 국제 질서에 대한 인식 부족을 드러내기도 한다 — 일본은 같은 해(1871) 청과 수호조규를 맺으며 동아시아 무대에 본격 등장하고 있었다.

병인양요 정족산성
정족산성 전투(1866). 양헌수 부대가 프랑스군을 격퇴한 곳. 비록 외규장각 도서 약탈을 막지 못했지만, 강화도 일대의 침입을 저지했다.
출처 · 강화 정족산성 · Wikimedia (CC BY-SA)
신미양요 광성보
광성보 전투(1871) 후 미군이 노획한 어재연 장군기(수자기). 미군은 우월한 화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수자기는 2007년 장기 대여 형태로 반환되었다.
출처 ·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 · Wikimedia (PD)

대원군의 하야와 개항의 분위기

1873년,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친정(親政)을 선언했고,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났다. 정권을 잡은 민씨 정권은 통상수교거부보다 개방적 입장으로 기울었다. 박규수·오경석·유홍기 같은 통상 개화론자들이 영향력을 확대했고, 사회 전반에서 '이양선이 닿는 시대'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져 갔다.

사료 · 박규수의 통상 주장
"지금 세계의 정세를 보건대, 사방의 나라가 모두 통상으로 부강을 도모하고 있으니, 우리만 홀로 고립되어 있을 수 없다. ⋯ 만약 일찍이 길을 열어 그 기술과 물자를 받아들였다면, 어찌 오늘날의 곤경에 이르렀겠는가?"
— 박규수, 『환재집(瓛齋集)』 (1870년대 초)
읽기 포인트 —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1861·1872년 두 차례 청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양무운동을 관찰했다. 그는 '통상을 거부하면 결국 침략당한다'는 논리로 김옥균·박영효·홍영식 등 후일의 개화파를 길러냈다. 박규수의 사랑방은 사실상 조선 개화 사상의 산실이었다.
▶ 개항으로 가는 다섯 걸음 · 1864 → 1876
1864
대원군 섭정
1866
병인양요
1871
신미양요
1875
운요호 사건
1876
강화도 조약
단계를 클릭해 보세요.
흥선대원군
1820~1898
통상수교거부
박규수
1807~1877
통상 개화론
신헌
1810~1884
강화도 조약
구로다 기요타카
일본 · 1840~1900
운요호·강화도
최익현
1833~1906
척사위정
P
매슈 페리
미국 · 1794~1858
일본 개항(비교)
INTERACTIVE · 동아시아 정세

개항 전후 동아시아의 격동

연도를 눌러 청·일·조선의 결정적 장면을 살펴보세요

아편 전쟁
출처 · 위키미디어

1842 · 난징조약과 아편전쟁

청의 패배, 동아시아 질서의 균열

영국의 함포 외교에 청이 무릎을 꿇었다. 다섯 항구가 강제 개항되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동아시아의 종주국이 무너지자 주변국에 충격이 번졌다.

  • 난징조약(8월) — 5항 개항, 홍콩 할양
  • 공행(특허상인) 폐지, 영사재판권
  • 조선 — 헌종 8년, 안동김씨 세도정치
  • 일본 — 막부 말기, 도쿠가와 이에요시 시대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메이지 정부는 1860년대 후반부터 조선과의 외교 갱신을 시도했지만, 일본의 국서가 '황(皇)'·'칙(勅)' 자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조선이 거부했다(서계 분쟁). 결국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의 빗장을 열기로 했다.

운요호 사건(1875)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무단 진입해 조선군의 발포를 유도했다. 운요호는 압도적 화력으로 영종도까지 점령했다가 철수했다. 일본은 이듬해 6척의 군함과 8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강화도를 위협하며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최익현은 '왜와 양이는 한통속(왜양일체론)'이라며 척화를 주장했지만, 박규수와 신헌 등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했다. 결국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장면
강화도 조약 체결 장면(1876, 강화 연무당). 조선 측에서는 신헌(申櫶), 일본 측에서는 구로다 기요타카(黒田淸隆)가 서명했다. 일본은 조선을 '자주국'이라 명문화함으로써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는 외교적 효과를 노렸다.
출처 · 일본 외교사료관 · Wikimedia (PD)

강화도 조약의 내용과 성격

조일 수호 조규는 총 12관(款)으로 구성된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사료 ·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1876)
"제1관. 조선국은 자주(自主)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4관. 조선국은 부산 외에 두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 인민의 왕래·통상을 허가한다.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암초가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가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도록 한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의 지정된 항구에서 죄를 범한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한다."
— 「조일 수호 조규」(1876년 2월 27일)
읽기 포인트 — ① 1관의 '자주국' 규정은 청의 종주권 부정을 노린 일본의 정치적 포석이다. ② 4관은 부산(1876)·원산(1880)·인천(1883)의 차례 개항으로 이어졌다. ③ 7관의 해안 측량권은 군사적·경제적 침투의 통로였다. ④ 10관의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은 조선의 사법 주권을 침해했다. 무엇보다 이 조약에는 관세 규정이 없었다—이는 일본 상품의 무관세 침투를 허용한 치명적 결함이었다.

강화도 조약의 부속 조약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일본은 추가 조약을 체결해 침투의 발판을 굳혔다. 조일 수호 조규 부록(1876.7)으로 개항장에서 일본 외교관의 자유 여행권과 일본 화폐 통용권을 얻어냈고, 조일 무역 규칙(통상장정)(1876.7)으로 일본 상품의 무관세 무역곡물 자유 수출을 명문화했다. 이로써 일본 상인은 사실상 자유롭게 조선 시장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DEEP DIVE · 학계의 쟁점
강화도 조약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강화도 조약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뉜다.

강요된 개항론: 운요호의 함포 외교, 압도적 군사 위협 하에 체결된 만큼 조약의 본질은 제국주의 침략의 시작이다. 무관세·치외법권·해안측량권은 명백히 주권을 침해한 조항이며, 이후 잇따른 불평등 조약과 일본의 경제 침투의 시발점이 되었다.

국제 무대로의 진출론: 조선이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 국제 사회로 들어선 계기였으며, 만약 더 일찍 더 자율적인 형태로 개항을 추진했다면 후일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개항 자체의 불가피성보다 준비 부족이 더 큰 문제였다는 시각이다.

오늘날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는 두 시각의 통합이다 — 개항 자체는 불가피했지만, 그 형식과 내용은 명백히 불평등했고, 조선의 자율적 준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 평가는 후일의 '근대화' 평가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질문이다.

DEBATE · 두 입장이 부딪치다
강화도 조약 — 자주적 개항인가, 강제 침탈의 시작인가?
강제 침탈의 시작
  • 운요호의 함포 외교에 의한 강요
  • 무관세·치외법권·해안측량권 일방적
  • 일본의 메이지 침략 정책의 연장
  • 이후 청·일 각축장으로 전락하는 출발점
VS
국제 무대로의 진출
  •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를 벗어남
  •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
  • 3항 개항으로 무역·교류 가능
  • 개항 자체는 불가피, 문제는 준비 부족

서양 열강과의 조약 — 조약 체제의 확립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서양 각국과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이는 청의 권유와 미국의 적극적 접근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은 전 세계 열강과 동시에 마주서는 처지가 되었다.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1882년 5월, 조선은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청의 이홍장이 적극 중재한 결과였다. 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조선 종주권을 확인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사료 ·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
"제1관. 양국은 영원히 친목·우호를 도모한다. 만약 다른 나라가 한쪽 정부에 부당하거나 강압적인 일을 행할 때, 다른 한쪽 정부는 즉시 통지를 받고 중재 주선(거중조정, good offices)을 잘 행하여 우의를 보여 준다.

제4관. 미국 시민이 조선국에서 죄를 범하면 미국 관원이 미국 법률에 따라 처리한다(영사재판권).

제5관. 미국 상민이 가져오는 화물에 대하여는 그 수출입 세칙에 따라 관세를 매긴다(협정 관세).

제14관. 양국은 최혜국 대우를 적용한다."
—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년 5월 22일)
읽기 포인트 — 강화도 조약과 비교하면 두 가지가 새롭다. ① 거중조정(good offices) 조항: 후일 1905년 을사늑약 때 고종이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을 통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 사실을 보면 이 조항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알 수 있다. ② 최혜국 대우: 어떤 다른 나라에 더 좋은 조건을 주면 자동으로 미국도 그 혜택을 받는다는 조항으로, 이후 다른 서양 국가와의 조약에서 일률적으로 적용되어 주권의 잠금 효과를 만들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과 서양 각국과의 조약

임오군란(1882) 진압을 빌미로 들어온 청은 1882년 8월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강요했다. 첫 머리에 '속방(屬邦)'을 명시해 종주권을 공식화하고, 청 상인의 내륙 통상권과 영사재판권을 확보했다. 이는 일본과 청의 조선 시장 쟁탈전을 격화시켰다.

이어 조선은 영국·독일(1883)·이탈리아·러시아(1884)·프랑스(1886) 등 서양 각국과 차례로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 모든 조약은 영사재판권·최혜국 대우·협정 관세를 핵심으로 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선은 이로써 국제 조약 체제에 편입되었지만, 그 편입의 방식은 처음부터 주권의 결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조약연도상대국핵심 조항특징
강화도 조약1876일본3개항 개항·해안측량·영사재판·무관세최초의 근대 조약
조일 수호 조규 부록·통상장정1876일본일본 화폐 유통·무관세·곡물 자유 수출경제 침투의 발판
조미 수호 통상 조약1882미국거중조정·최혜국대우·협정관세·영사재판최초의 서양국 조약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1882속방(屬邦) 명시·내륙 통상·영사재판청의 종주권 공식화
조영·조독 수호 통상 조약1883영국·독일영사재판·최혜국·내지 통상권치외법권 강화
조러·조프 수호 통상 조약1884·1886러시아·프랑스최혜국·천주교 포교 인정(프)열강 각축장 진입
INTERACTIVE · 조약 비교

불평등 조약, 조항을 뜯어보다

조약을 선택하고 조항을 클릭하면 의미와 문제점이 나옵니다

강화도 조약 (조일 수호 조규)

1876년 2월 27일 · 강화 연무당 · 총 12관
조항을 선택하세요
왼쪽의 조약 조항을 클릭하면 그 의미와 역사적 문제점을 자세히 풀어드립니다.

사료로 묻는 개항

개항은 강제된 것인가, 불가피한 것인가? 사료로 그 시대 인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CHECK · 사료 해석 ①
다음 사료에서 알 수 있는 1876년 조약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로 적절한 것은?
"제1관. 조선국은 자주(自主)의 나라이며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 제7관. 일본국 항해자가 조선국 연해의 도서·암초를 자유로이 측량할 수 있도록 한다. ⋯ 제10관. 일본국 인민의 죄는 일본국 관원이 심판한다."
— 「조일 수호 조규」(1876)
해설 — 제1관의 '자주국' 명문화는 일본이 청의 종주권을 부정하기 위한 정치적 포석이지, 조선의 자율성을 보장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반면 제7관의 해안 측량권은 군사적·경제적 침투의 통로이며, 제10관의 영사재판권(치외법권)은 명백한 사법 주권 침해이다. 형식상의 '자주'와 실질적 '주권 침해'의 모순이 강화도 조약의 본질이다. (참고로 무관세 조항은 본 조약이 아니라 부속 조약인 통상장정에 명시되었다.)
CHECK · 사료 해석 ②
다음 비문(척화비)의 정치적 의미로 가장 적절한 것은?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할 때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
— 「척화비」(1871)
해설 — 척화비는 신미양요(1871) 직후 흥선대원군이 전국 200여 곳에 세운 비석으로, 두 차례의 양요 격퇴를 자신의 정권 정통성으로 삼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선언한 것이다. 비문에서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고 한 것은 병인양요 때 작성한 글을 신미양요 후 비로 세웠음을 뜻한다. 1873년 대원군 하야 후 고종이 친정에 나서면서 통상수교거부정책은 점차 폐기되었다.
MINI GAME · 시간 여행
개항 가는 길 — 시간 순으로 배열
아래 6개의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클릭하세요. 모두 맞히면 도장이 찍힙니다.
0 / 6
MINI GAME · 인물 매칭
인물과 사건을 짝지어 보세요
왼쪽에서 인물을 한 명 고른 뒤, 오른쪽에서 관련 사건/사상을 클릭하세요.
인물·세력
흥선대원군
박규수
최익현
신헌
메이지 유신(일본)
사건·키워드
척사위정 · 5불가소(1876 상소)
1868 · 동아시아 개항 격동
강화도 조약 조선측 대표
척화비 · 경복궁 중건
통상 개화론 · 셔먼호 대응
맞힌 짝 · 0 / 5
📖 더 깊이 — 사료 더 보기: 최익현의 「병자척화소(5불가소)」(1876)

최익현(1833~1906)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직전, 도끼를 가지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지부복궐)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다섯 가지 이유로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 또는 흔히 '5불가소(五不可疏)'라 부른다.

"1. 일본은 무력으로 위협하니, 이는 화친의 모습이 아니다(强和則必不能成).
2. 일본 물건은 사치품이라 우리의 살림을 무너뜨릴 것이다(物貨敵國).
3. 일본은 양이(서양)와 한통속이니, 그들과 화친함은 곧 천주교를 받아들임이다(왜양일체론).
4. 일본은 인의를 모르는 짐승의 무리(禽獸)와 같다.
5. 한번 빗장을 열면 무한히 침투해 끝내는 나라가 망한다."
— 최익현, 『면암집(勉菴集)』 권3, 「병자년에 도끼를 가지고 올린 상소(丙子持斧伏闕疏)」

이 상소는 위정척사 사상의 가장 대표적 문서로 꼽힌다. 핵심은 "일본은 이미 서양화된 나라이므로 일본과의 통상은 곧 서양과의 통상과 같다"는 왜양일체론이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지만, 최익현의 척사 정신은 후일 을미의병(1895)·을사의병(1905)으로 이어지는 의병 운동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그는 결국 1906년 대마도에 유배되어 단식 끝에 순국했다.

정리와 탐구

한눈에 보기 — 개항의 흐름

연도사건의의
1842난징조약동아시아 최초의 근대 조약·청 패배
1854미일 화친조약일본 개국
1863고종 즉위·흥선대원군 섭정왕권 강화·통상수교거부
1866병인박해·병인양요·제너럴 셔먼호대원군 통상거부 정책의 격화
1868일본 메이지유신'탈아입구', 조선에 위협 등장
1871신미양요·척화비 건립대원군 통상수교거부의 절정
1873최익현의 상소·대원군 하야고종 친정·개항 분위기 형성
1875운요호 사건일본의 무력 시위
1876강화도 조약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1882조미·조청 조약서양 열강과 청의 본격 진입
1883~86조영·조독·조러·조프 조약열강 각축장으로 편입
EXPLORE · 탐구해 봅시다

개항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開港 마스터
"닫혔던 500년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짚었습니다."
다음은 근대 국가 수립을 위한 시도를 살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