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동안 닫혔던 문이 열렸을 때, 조선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가?"
19세기 중반, 동아시아의 오랜 조공·책봉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영국 함대의 포격으로 청이 무릎을 꿇고(아편 전쟁, 1840), 페리 함대의 출현으로 일본이 막부를 무너뜨렸다(메이지 유신, 1868). 그 거대한 파도는 마침내 한반도에까지 닿았다.
이 단원에서는 조선의 개항이 단순한 항구의 개방이 아니라 국제 질서의 거대한 전환이었음을 살펴본다.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잇따른 서양 열강과의 조약 — 이 모든 사건은 한반도가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에서 근대적 조약 체제로 강제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개항은 누구에게는 '개화'였고 누구에게는 '치욕'이었으며, 누구에게는 '굴종'이었다. 이 단원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 조선의 개항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외세의 폭압과 내부의 준비 부족이 어떻게 교차했고, 그 결과 어떤 불평등의 사슬이 만들어졌는가?
▲ 개항기의 네 단계 — 통상 거부 → 무력 개항 → 조약 확산 → 주권 잠금
조선의 개항을 이해하려면 먼저 19세기 동아시아 전체의 풍경을 보아야 한다. 천하의 중심은 더 이상 베이징이 아니었다. 산업 혁명을 마친 서양 열강이 동아시아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영국은 청과의 무역 적자를 메우려고 인도산 아편을 청에 밀수출하였다. 청의 임칙서가 아편을 몰수·소각하자 영국은 이를 빌미로 함대를 파견했고, 압도적 화력 앞에 청은 패배하였다(아편 전쟁, 1840~1842). 그 결과 체결된 난징 조약(1842)은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었다.
아편 전쟁의 충격은 청 지식인들의 자기 인식을 흔들었다. 위원의 『해국도지』(1842), 서계여의 『영환지략』(1848) 같은 책이 출간되어 서양의 실체를 알리려 했고, 이는 조선의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 통상 개화론자들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다.
1853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흑선(증기 함대)을 이끌고 에도만에 나타났다. 막부는 다음 해 미일 화친 조약(1854), 1858년 미일 수호 통상 조약(불평등 조약)을 맺고 개항하였다. 무능한 막부 정권에 분노한 하급 사무라이들이 천황 중심의 새 정부를 수립하니, 이것이 메이지 유신(1868)이다.
새로 들어선 메이지 정부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기치 아래 서양식 군대·산업·교육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당한 불평등 조약을 그대로 조선에 강요하기 시작했다. 제국이 되려는 자, 먼저 식민을 만드는 법 — 이것이 1870년대 일본의 논리였다.
16세기까지 동서양의 경제력 격차는 크지 않았다. 일부 연구자들은 1800년경 중국의 GDP가 서유럽 전체와 비등했다고 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세 나라(청·일본·조선)는 모두 서양의 압력에 굴복했다. 왜인가?
① 산업 혁명의 격차: 증기 기관·강철 함포·전신은 군사력의 차원을 바꾸어 놓았다. ② 국가 체제의 차이: 서양의 근대 국민 국가는 동아시아의 전통 왕조보다 효율적인 동원 능력을 가졌다. ③ 중화 질서의 자만: 청은 자국이 세계의 중심이라 믿었기에 외부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위로부터의 혁명'을 가능케 한 사무라이 계층의 결집, 막부와 번(藩)의 경쟁 구조, 페리 내항의 '비교적 평화적' 충격 — 여러 요인이 겹쳤다. 조선은 이 모델을 의식했지만, 자신의 조건에 맞게 변용하는 데 실패했다.
1863년, 12살의 어린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하응)이 섭정에 올랐다. 그는 60년 세도 정치의 적폐를 청산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거세지는 서양의 통상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를 비롯한 외척 세도가를 축출하고, 비변사를 사실상 폐지하여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복구했다.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하고, 환곡의 폐단을 막기 위해 사창제를 도입했다. 사림 정치의 거점이 되어 폐단을 일으키던 서원 600여 곳을 47개로 정리하는 강수도 두었다.
한편 왕실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했는데(1865~1872),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하려고 원납전을 강요하고 당백전이라는 악화를 발행해 백성의 원성을 샀다. 즉, 대원군의 개혁은 왕권 강화와 민생 부담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양면적 성격을 가졌다.
1866년 초, 대원군은 프랑스 신부 9명과 천주교 신자 8,000여 명을 처형하였다(병인박해). 이를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하니, 이것이 병인양요(1866)이다. 한성근(문수산성)과 양헌수(정족산성)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은 물러갔지만, 외규장각 도서 약 300권을 약탈해 갔다.
같은 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에게 격침되었다(1866). 5년 뒤 미국은 이를 빌미로 함대를 파견했다(신미양요, 1871). 광성보 전투에서 어재연 부대가 결사 항전 끝에 거의 전멸했지만, 미군 역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1873년, 최익현이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자 고종은 친정(親政)을 선언했고, 대원군은 정계에서 물러났다. 정권을 잡은 민씨 정권은 통상수교거부보다 개방적 입장으로 기울었다. 박규수·오경석·유홍기 같은 통상 개화론자들이 영향력을 확대했고, 사회 전반에서 '이양선이 닿는 시대'를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인식이 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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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함포 외교에 청이 무릎을 꿇었다. 다섯 항구가 강제 개항되고,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었다. 동아시아의 종주국이 무너지자 주변국에 충격이 번졌다.
메이지 정부는 1860년대 후반부터 조선과의 외교 갱신을 시도했지만, 일본의 국서가 '황(皇)'·'칙(勅)' 자를 사용했다는 이유로 조선이 거부했다(서계 분쟁). 결국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의 빗장을 열기로 했다.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무단 진입해 조선군의 발포를 유도했다. 운요호는 압도적 화력으로 영종도까지 점령했다가 철수했다. 일본은 이듬해 6척의 군함과 8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강화도를 위협하며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최익현은 '왜와 양이는 한통속(왜양일체론)'이라며 척화를 주장했지만, 박규수와 신헌 등은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했다. 결국 1876년 2월 27일, 강화도 연무당에서 조일 수호 조규(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다.
조일 수호 조규는 총 12관(款)으로 구성된 조선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일본은 추가 조약을 체결해 침투의 발판을 굳혔다. 조일 수호 조규 부록(1876.7)으로 개항장에서 일본 외교관의 자유 여행권과 일본 화폐 통용권을 얻어냈고, 조일 무역 규칙(통상장정)(1876.7)으로 일본 상품의 무관세 무역과 곡물 자유 수출을 명문화했다. 이로써 일본 상인은 사실상 자유롭게 조선 시장을 공략할 수 있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두 갈래로 나뉜다.
① 강요된 개항론: 운요호의 함포 외교, 압도적 군사 위협 하에 체결된 만큼 조약의 본질은 제국주의 침략의 시작이다. 무관세·치외법권·해안측량권은 명백히 주권을 침해한 조항이며, 이후 잇따른 불평등 조약과 일본의 경제 침투의 시발점이 되었다.
② 국제 무대로의 진출론: 조선이 전통적 동아시아 질서에서 벗어나 근대 국제 사회로 들어선 계기였으며, 만약 더 일찍 더 자율적인 형태로 개항을 추진했다면 후일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개항 자체의 불가피성보다 준비 부족이 더 큰 문제였다는 시각이다.
오늘날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는 두 시각의 통합이다 — 개항 자체는 불가피했지만, 그 형식과 내용은 명백히 불평등했고, 조선의 자율적 준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 평가는 후일의 '근대화' 평가와도 직결되는 중요한 질문이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서양 각국과 차례로 조약을 맺었다. 이는 청의 권유와 미국의 적극적 접근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조선은 전 세계 열강과 동시에 마주서는 처지가 되었다.
1882년 5월, 조선은 미국과 조미 수호 통상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청의 이홍장이 적극 중재한 결과였다. 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지만, 동시에 자신의 조선 종주권을 확인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임오군란(1882) 진압을 빌미로 들어온 청은 1882년 8월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강요했다. 첫 머리에 '속방(屬邦)'을 명시해 종주권을 공식화하고, 청 상인의 내륙 통상권과 영사재판권을 확보했다. 이는 일본과 청의 조선 시장 쟁탈전을 격화시켰다.
이어 조선은 영국·독일(1883)·이탈리아·러시아(1884)·프랑스(1886) 등 서양 각국과 차례로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 이 모든 조약은 영사재판권·최혜국 대우·협정 관세를 핵심으로 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선은 이로써 국제 조약 체제에 편입되었지만, 그 편입의 방식은 처음부터 주권의 결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 조약 | 연도 | 상대국 | 핵심 조항 | 특징 |
|---|---|---|---|---|
| 강화도 조약 | 1876 | 일본 | 3개항 개항·해안측량·영사재판·무관세 | 최초의 근대 조약 |
| 조일 수호 조규 부록·통상장정 | 1876 | 일본 | 일본 화폐 유통·무관세·곡물 자유 수출 | 경제 침투의 발판 |
| 조미 수호 통상 조약 | 1882 | 미국 | 거중조정·최혜국대우·협정관세·영사재판 | 최초의 서양국 조약 |
|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 1882 | 청 | 속방(屬邦) 명시·내륙 통상·영사재판 | 청의 종주권 공식화 |
| 조영·조독 수호 통상 조약 | 1883 | 영국·독일 | 영사재판·최혜국·내지 통상권 | 치외법권 강화 |
| 조러·조프 수호 통상 조약 | 1884·1886 | 러시아·프랑스 | 최혜국·천주교 포교 인정(프) | 열강 각축장 진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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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은 강제된 것인가, 불가피한 것인가? 사료로 그 시대 인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보자.
최익현(1833~1906)은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직전, 도끼를 가지고 광화문 앞에 엎드려(지부복궐)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다섯 가지 이유로 논박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를 「병자척화소(丙子斥和疏)」 또는 흔히 '5불가소(五不可疏)'라 부른다.
"1. 일본은 무력으로 위협하니, 이는 화친의 모습이 아니다(强和則必不能成).
2. 일본 물건은 사치품이라 우리의 살림을 무너뜨릴 것이다(物貨敵國).
3. 일본은 양이(서양)와 한통속이니, 그들과 화친함은 곧 천주교를 받아들임이다(왜양일체론).
4. 일본은 인의를 모르는 짐승의 무리(禽獸)와 같다.
5. 한번 빗장을 열면 무한히 침투해 끝내는 나라가 망한다."
— 최익현, 『면암집(勉菴集)』 권3, 「병자년에 도끼를 가지고 올린 상소(丙子持斧伏闕疏)」
이 상소는 위정척사 사상의 가장 대표적 문서로 꼽힌다. 핵심은 "일본은 이미 서양화된 나라이므로 일본과의 통상은 곧 서양과의 통상과 같다"는 왜양일체론이다. 비록 시대의 흐름을 막지는 못했지만, 최익현의 척사 정신은 후일 을미의병(1895)·을사의병(1905)으로 이어지는 의병 운동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 그는 결국 1906년 대마도에 유배되어 단식 끝에 순국했다.
| 연도 | 사건 | 의의 |
|---|---|---|
| 1842 | 난징조약 | 동아시아 최초의 근대 조약·청 패배 |
| 1854 | 미일 화친조약 | 일본 개국 |
| 1863 | 고종 즉위·흥선대원군 섭정 | 왕권 강화·통상수교거부 |
| 1866 | 병인박해·병인양요·제너럴 셔먼호 | 대원군 통상거부 정책의 격화 |
| 1868 | 일본 메이지유신 | '탈아입구', 조선에 위협 등장 |
| 1871 | 신미양요·척화비 건립 | 대원군 통상수교거부의 절정 |
| 1873 | 최익현의 상소·대원군 하야 | 고종 친정·개항 분위기 형성 |
| 1875 | 운요호 사건 | 일본의 무력 시위 |
| 1876 | 강화도 조약 |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
| 1882 | 조미·조청 조약 | 서양 열강과 청의 본격 진입 |
| 1883~86 | 조영·조독·조러·조프 조약 | 열강 각축장으로 편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