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길은 우리를 어떻게 세계와 연결시켰는가?" — 한국사는 결코 고립된 역사가 아니었다.
한국사는 단 한 번도 동아시아·세계와 단절된 적이 없다. 시대마다 형태는 달랐지만, 한반도의 정치체는 늘 중국 왕조·북방 유목 세력·일본·서역과 외교·교역·전쟁의 그물망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왔다.
이 단원에서는 고대·고려·조선의 국제 관계를 시대 횡단적으로 비교한다. 단순히 어느 왕이 어느 나라와 어떤 조약을 맺었는지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① 조공·책봉 체제가 어떻게 변천했는가, ② 한반도가 어떤 방식으로 다층 외교를 펼쳤는가, ③ 교류와 갈등이 우리 사회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가를 묻는다.
특히 주목해야 할 개념이 조공·책봉(朝貢冊封)이다. 이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형식적으로 중국 황제를 천자로 인정하고, 그 대가로 외교·무역·정치적 안정을 보장받은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였다. 그러나 조공이 곧 종속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한반도의 왕조들은 조공의 형식 안에서 실질적 자율성을 누렸으며, 때로는 그 형식조차 도전했다.
▲ 대외 관계의 네 차원 — 외교는 단순한 군사·정치가 아니다
고대 한국의 외교는 단일한 중국과의 사대 관계가 아니라, 여러 중심을 동시에 상대하는 다극 외교였다. 삼국은 중국의 남조와 북조, 북방 유목민, 일본과 동시에 거래하며 활로를 모색했다.
4~6세기 중국은 위·진 남북조 시대의 분열기였다. 이는 삼국에 선택의 여지를 주었다. 백제는 주로 남조(송·제·양)와 활발히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고(무령왕릉의 양식이 양나라 영향), 고구려는 북조(북위)와 외교하면서도 남조와도 동시에 통하는 양면 외교를 펼쳤다. 신라는 가장 늦게 중국과 직접 교류를 시작했으며, 6세기 진흥왕이 한강을 점령하면서 비로소 당항성을 통해 직통 무역로를 열었다.
통일 신라는 당과 견당사(遣唐使)를 정례적으로 파견하며 빈번한 교류를 이어 갔다. 산둥 반도의 신라방(新羅坊)·신라소(新羅所)·신라관(新羅館)·법화원(法華院) 등 신라인의 거류지가 형성되었고, 최치원은 당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발해는 당과 처음에는 무력 충돌(무왕대, 발해의 산둥 공격)을 했지만, 문왕대 이후 당의 3성 6부 제도를 받아들이며 활발히 교류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리었다.
9세기 초, 신라인 장보고는 당에서 군 경력을 쌓은 뒤 귀국하여 흥덕왕에게 청하여 완도에 청해진(828)을 설치했다. 그는 황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신라·당·일본을 잇는 삼각 무역의 패권을 잡았다. 일본 승려 엔닌(円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는 장보고를 "해상의 왕"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중앙의 진골 귀족과 갈등 끝에 846년 암살당하며 청해진도 폐쇄되었다.
삼국은 일본과도 활발히 교류했다. 백제의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했고, 고구려 담징은 호류지에 금당 벽화를 그렸다. 신라는 처음 일본과 적대적이었으나, 통일 후에는 사신을 주고받았다. 실크로드를 통해서는 페르시아·이슬람 세계의 유리 그릇, 카펫, 향료가 경주까지 들어왔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은 그 외양 묘사로 보아 아랍계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조공·책봉 체제는 흔히 한국 왕조의 '사대주의'의 증거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현대 학계의 다수 해석은 조공을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의례적 외교 형식으로 본다. ① 조공국은 책봉을 통해 정치적 정통성을 얻고, ② 조공품의 몇 배에 달하는 회사품(回賜品)을 받아 사실상 무역 흑자를 누렸으며, ③ 내정·왕위 계승·법제는 거의 자율적으로 운영했다.
심지어 고구려는 북위와 송 양쪽에 동시에 조공해 외교 자원을 극대화했고, 백제는 책봉의 형식으로 자국 왕의 권위를 일본에까지 과시했다. 조공은 비대칭적 평등의 외교 언어였다는 평가가 오늘날 정설에 가깝다.
고려는 한국사에서 가장 다극적·개방적인 외교를 펼친 왕조였다. 송·요·금·원·일본·서역·동남아시아까지, 고려의 외교 지도는 동아시아를 넘어 펼쳐졌다.
10세기 후반, 중국은 송이 통일했지만 만주에는 거란의 요(遼)가, 곧이어 여진의 금(金)이 등장했다. 고려는 ① 송과 친선 외교를 유지하면서, ② 요·금에 대해서는 형식적 조공으로 평화를 사고, ③ 군사적으로는 강동 6주를 확보(서희, 993)하는 실리 외교를 펼쳤다. 거란의 1·2·3차 침입(993·1010·1018)에서 강감찬의 귀주대첩(1019)으로 강화 조약을 체결한 것이 대표적이다.
고려의 수도 개경 외항이었던 벽란도는 동아시아의 대표적 국제 무역항이었다. 송 상인이 비단·서적·도자기·약재·향료를 가져왔고, 고려는 인삼·종이·먹·금·은·나전·청자·화문석으로 응답했다. 아라비아 상인까지 들어와 수은·향료를 거래했는데, 이때 '꼬레아(Corea)'라는 이름이 서양에 알려졌다는 설이 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1231~)은 고려에 미증유의 시련이었다. 강화 천도(1232)·삼별초 항쟁(1270~1273) 끝에 굴복한 고려는 원 간섭기에 들어섰다.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약 80년간, 고려 왕은 원 황실의 부마(駙馬)가 되었고, 정동행성·다루가치 등을 통해 내정 간섭을 받았다. 변발·호복 등 몽골 풍습이 유행했고, 응방·매·환관·공녀의 진공이 강제되었다.
그러나 원의 간섭만 강조하는 것은 일면적이다. 원 간섭기는 동시에 한반도가 가장 넓은 세계와 연결된 시기이기도 했다. 색목인 관료, 위구르 환관, 페르시아 상인이 개경을 오갔고, 고려청자·인쇄술이 원을 거쳐 서역까지 전파되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1356~)으로 간섭기는 끝났으나, 그 문화적 흔적(소주·만두·족두리 등)은 지금까지 남아 있다.
고려는 여진을 회유하기 위해 무역을 허용했지만, 12세기 초 여진이 강성해지자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동북 9성을 개척(1107)했다. 일본과는 사신을 주고받았지만, 고려 말기부터 왜구(倭寇)의 침입이 본격화되어 최무선이 화통도감을 설치(1377)하고 진포 해전(1380)에서 격파했다.
셀을 눌러 시대별 외교의 특징을 비교해 보세요
조선은 건국 직후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 노선을 표방했다. 명·청에는 사대(事大), 일본·여진·유구에는 교린(交隣)을 원칙으로 한 이원적 외교 체제였다.
조선은 명에 매년 정기 사신(동지사·정조사·성절사)을 보냈고, 명은 조선왕 책봉·역법·서적 등을 회사했다. 사대는 형식적 의례였지만, 동시에 조선의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는 외교 자산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명의 원군 파병은 사대 관계의 실질적 효과를 보여 준 사건이었다. 청이 건국된 뒤 조선은 병자호란을 거치며 마지못해 청을 종주국으로 받아들였지만, 북벌론(효종)·북학론(18C, 박지원·박제가)으로 그 굴종을 정신적으로 극복하려 했다. 사신단(연행사)은 청으로 가서 신문물·서적·서학을 들여오는 실질적 문화 통로였다.
일본과는 1404년 외교 관계 수립 이후 사신단을 주고받았다. 임진왜란(1592)으로 단절되었으나, 도쿠가와 막부의 요청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 200년간 통신사(通信使)가 12차례 파견되었다. 정사·부사·서장관 등 400~500명에 이르는 대규모 사절단은 한양에서 에도(도쿄)까지 약 1년에 걸쳐 다녀왔다. 통신사는 단순한 외교를 넘어 일본 지식인들에게 조선 문화의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의 유학자들은 조선 통신사 서기들과 필담을 나누고 시문을 주고받았다.
16세기 말 임진·정유왜란(1592~1598)은 조선·명·일본의 7년 전쟁이었다. 이순신의 해전 승리(한산도·명량·노량)와 의병·승병의 활약, 명군의 참전으로 끝났지만, 조선 인구의 약 1/4 손실과 도자기·인쇄공 등 기술자의 일본 이송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7세기 정묘·병자호란(1627·1636)은 만주 후금(청)의 침입이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간 농성했으나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했고, 소현세자·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갔다. 두 전쟁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재편하고, 조선의 외교를 실리주의에서 명분주의로 기울게 만들었다.
고려와 비교했을 때 조선의 외교는 분명 더 좁아진 면이 있다. ① 사대교린의 이원 체제로 압축되었고, ② 벽란도 같은 국제 무역항이 사라졌으며, ③ 민간 무역이 엄격히 통제되었다. 일부 학자는 이를 '쇄국'의 단초로 본다.
그러나 다른 해석도 있다. ① 사신단(연행사·통신사)을 통한 공식 외교 채널은 오히려 더 정교해졌고, ② 책문 후시·중강 개시·왜관 무역 등 제한적 민간 무역은 활발히 유지되었으며, ③ 17~18세기 청의 신문물·서양 학문(서학)이 사신단을 통해 들어왔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박제가의 『북학의』가 그 증거다.
오늘날 학계는 조선 외교를 단순히 '쇄국'으로 보지 않고, 의례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정착된 평화의 시대로 평가하는 시각이 다수이다.
『해동제국기(海東諸國紀)』(1471)는 신숙주가 일본 사신(통신사 부사)으로 다녀온 경험을 바탕으로 쓴 외교 지침서이다. 일본의 지리·역사·정치·풍속·왜관 무역 절차까지 망라했다.
"이웃 나라와 교제하고 사신을 통하여 풍속이 다른 사람들을 어루만지려면, 반드시 그 실정을 알아야 그 예절을 다할 수 있고, 그 예절을 다하여야 그 마음을 다할 수 있다."
— 신숙주, 『해동제국기』 서문
신숙주는 죽음을 앞두고 성종에게 "원컨대 일본과 화친을 잃지 마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120년 전, 그의 경고는 안타깝게도 잊혔다.
| 구분 | 고대 | 고려 | 조선 |
|---|---|---|---|
| 대중국 관계 | 남북조에 양면 외교 / 당과 견당사 | 송과 친선·요금에 형식 조공 / 원 간섭기 | 명·청에 사대 / 정기 사신단 |
| 대일본 관계 | 백제·왜의 긴밀한 연합 / 신라 통일 후 사신 교환 | 왜구 침입 본격화(말기) | 통신사 교류(1607~1811) / 왜란 전후 단절·재개 |
| 북방 관계 | 고구려-수당 / 발해-말갈·당 | 거란·여진·몽골과 대립·복속 | 여진과 교린 → 청 사대 |
| 국제 무역 | 장보고 청해진 / 실크로드 서역품 | 벽란도 국제 무역항 / 아랍 상인 | 책문 후시·왜관·중강 개시 |
| 주요 갈등 | 수·당 침입(살수·안시성) | 거란 3차 / 여진 9성 / 몽골 30년 | 임진·정유 / 정묘·병자 |
| 사상적 자세 | 실리적 다극 외교 | 황제국 자처(연호·짐 칭호) / 실용 | 화이질서 내면화 / 사대교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