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난의 충격 뒤, 조선은 무엇을 바꾸려 했고 무엇이 바뀌지 않았는가?"
양난(왜란·호란)의 충격은 조선 사회의 모든 영역을 뒤흔들었다. 통치 체제·수취 제도·신분 질서·국제 인식—그 어느 하나 양난 이전과 같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17~18세기 약 200년간 새로운 균형 속에서 안정과 발전을 이루었다. 그 다음에는 19세기의 세도 정치라는 큰 위기가 찾아왔다.
이 단원은 조선 후기의 정치 흐름에 초점을 둔다. ① 양난 후의 통치 체제 재정비, ② 붕당의 변질과 환국 정치, ③ 탕평 정치의 절정, ④ 세도 정치의 폐단과 농민 봉기, ⑤ 흥선대원군의 마지막 개혁까지—약 250년의 정치사를 추적한다.
이 시기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조선의 양반 사대부 체제가 어떻게 변화하는 사회 현실에 대응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 한계를 드러냈는가? 탕평 정치는 그 가능성을, 세도 정치는 그 실패를, 대원군 개혁은 그 마지막 시도를 보여준다.
▲ 조선 후기 정치사 4단계 — 이 단원의 큰 골격
왜란·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충격 앞에서 조선의 기존 체제는 무력했다. 5위는 무너졌고, 의정부는 비변사에 밀려났다. 양난을 계기로 정치·군사·재정 체제는 모두 재편성을 거쳤으며, 그 결과 17세기 조선은 양난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비변사는 본래 3포왜란(1510) 이후 임시로 설치된 군사 회의 기구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① 군사뿐 아니라 정치·재정·인사 등 모든 국정을 합의하는 기구로 확대되었고, ② 의정부·6조를 사실상 무력화했으며, ③ 양난 이후에는 모든 고위 관료가 참여하는 사실상의 최고 권력 기구가 되었다.
비변사의 비대화는 결과적으로 ① 왕권의 약화(왕은 비변사 결정에 사후 재가만), ② 특정 가문(노론)의 권력 독점 통로 제공이라는 두 가지 문제를 낳았다. 19세기 세도 정치 하에서 비변사는 안동 김씨·풍양 조씨의 권력 본부가 된다. 결국 1865년 흥선대원군이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삼군부 체제를 부활시켰다.
왜란 직후 조선은 군사 체제를 대대적으로 개편했다. 중앙에는 5군영(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수어청·금위영)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그 중 훈련도감(1593)은 류성룡의 건의로 명의 척계광 『기효신서』를 모델 삼아 만든 부대로, 포수(조총)·살수(창검)·사수(활)의 삼수병 체제. 정부에서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급료병)이라는 점에서 양인개병의 5위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지방에는 속오군이 편성되었다. 양반·양인·노비를 모두 포함한 향촌 자위 부대로,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 동원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양반은 빠지고 천민층만 부담하게 되어, 양반의 군역 회피를 부추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왜란으로 인구가 격감하고 토지가 황폐화하자 기존의 수취 체제는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조선 후기 200여 년에 걸쳐 ① 전세(田稅)의 영정법(1635, 인조: 풍흉에 관계없이 1결당 4두 고정), ② 공납의 대동법(1608~1708 단계적 시행, 광해군~숙종: 토지 1결당 12두의 쌀·면포·동전으로 통일), ③ 군포의 균역법(1750, 영조: 2필 → 1필) 등 큰 개혁이 차례로 시행되었다.
※ 본 단원에서는 정치 흐름에 집중합니다. 수취 체제의 구체적인 내용과 의미는 「Ⅰ-02 사회 경제의 변화와 신분제 동요」 단원에서 본격적으로 다룹니다.
17세기 후반, 조선 정치는 격동기에 접어들었다. 두 차례의 예송 논쟁이 학문적·정치적 충돌의 시작을 알리고, 숙종 대의 세 차례 환국은 붕당 정치를 일당 전제로 변질시켰다. 정치가 합의가 아닌 절멸의 게임이 되어갔다.
현종 대 두 차례의 예송(禮訟) 논쟁은 효종과 효종 비의 사망 후,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조대비)가 몇 년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단순한 예법 논쟁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왕실을 일반 사대부 가례의 틀에 넣을 것인가, 특별한 예법으로 대할 것인가의 정치적·이념적 대립이었다.
| 구분 | 1차 예송(기해예송, 1659) | 2차 예송(갑인예송, 1674) |
|---|---|---|
| 계기 | 효종 승하 | 효종 비 인선왕후 승하 |
| 서인 주장 | 1년복(기년복) — 사대부 가례(『주자가례』) | 9개월복(대공복) |
| 남인 주장 | 3년복 — 왕은 일반인과 다름(왕통 중시) | 1년복(기년복) |
| 결과 | 서인 승리(1년복 채택) | 남인 승리(1년복 채택) |
예송은 단순한 예법이 아니라 붕당 간 정치적 헤게모니의 충돌이었다. 서인은 사대부 중심의 유교적 질서를, 남인은 왕권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1차에서는 서인이, 2차에서는 남인이 승리했고, 이로써 두 붕당은 사활을 건 대립으로 치달았다.
숙종(1674~1720)은 강력한 왕권을 휘둘렀다. 그는 붕당의 균형을 유지하기보다 한쪽 붕당을 전면 등용했다가 한꺼번에 내쫓는 방식—이를 환국(換局)이라 한다—을 반복했다. 세 차례 환국이 일어났다.
① 경신환국(1680): 남인의 영수 허적이 왕실 물건을 사적으로 사용한 사건('유악(油幄) 사건')을 계기로 남인이 대거 실각, 서인 집권. 윤휴 등 처형.
② 기사환국(1689): 숙종이 희빈 장씨 소생을 원자로 책봉하려 하자 서인(송시열 등)이 반대. 숙종이 서인을 숙청하고 남인 재집권. 송시열 사사.
③ 갑술환국(1694): 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계기로 남인 대거 실각, 서인 재집권. 이후 남인은 영구히 정계에서 밀려남.
환국의 결과는 분명했다. ① 정치 보복의 살벌함, ② 붕당 간 합의 정치의 종말, ③ 노론 일당 전제의 토대. 이후 영조가 즉위할 때는 이미 노론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고, 소론·남인은 가까스로 명맥만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붕당의 폐단이 극에 달했을 때, 두 군주가 그것을 정면 돌파하려 했다. 영조와 정조의 약 75년(1724~1800)은 조선 후기의 마지막 황금기라 불릴 만한 시기였다. 그들은 붕당을 넘어선 새로운 정치 질서—탕평(蕩平)—를 모색했다.
영조(1724~1776, 52년 재위)는 즉위 초 자신을 옹립한 노론의 압박 속에 있었다(영조의 어머니가 노론과 연결된 무수리 출신). 그러나 그는 탕평책을 통해 노론·소론을 모두 등용하고,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려 했다.
구체적인 정책들이다. ① 탕평비를 성균관 앞에 세움(1742: "周而不比 乃君子之公心"—두루 사귀되 편당 짓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다), ② 노론·소론 균형 인사, ③ 이조 전랑의 후임 추천권 폐지(1741, 붕당 분쟁의 근원이었던 제도), ④ 서원 정리(1741, 사액 서원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정리), ⑤ 균역법(1750, 군포를 2필 → 1필로), ⑥ 신문고 부활, ⑦ 청계천 준설 등 민생 정책.
그러나 영조의 만년에는 비극이 있었다. 노론과 결탁한 신하들이 사도세자(영조의 아들)를 음해했고, 영조는 1762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 죽게 했다(임오화변). 사도세자의 아들이 바로 정조이다.
정조(1776~1800)는 즉위 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했다. 아버지를 죽인 노론에 대한 경계는 그의 정치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영조보다 더 적극적인 탕평—준론 탕평(노론 시파, 소론, 남인 중에서 의리와 실력 있는 인물 등용)—을 폈고, 자신의 친위 세력을 적극 구축했다.
정조의 대표적 정책들. ① 규장각(1776, 왕실 도서관 겸 학술 기구)을 설치해 정약용·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 젊은 학자(검서관)를 등용. 이 중 일부는 서얼이거나 남인이었다. ② 장용영(1788, 친위 부대)을 설치해 노론의 군사력을 견제. ③ 초계문신제(1781, 젊고 유능한 관료를 재교육)로 자신의 친위 세력 육성. ④ 수원 화성(1789~96, 정약용 설계·거중기 사용)을 건설해 새 도시·새 군사 거점 마련. ⑤ 신해통공(1791,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 폐지)으로 자유 상업 진흥. ⑥ 서얼·노비에 대한 차별 완화.
정조의 정치는 단순한 군주 친정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세력(중인·서얼·실학자·남인)을 정치에 끌어들이는 시도였다. 만약 정조가 더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운명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49세로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그의 모든 시도는 좌초되었다. 11세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과 함께 노론 벽파의 반동이 시작된다.
영조·정조의 탕평 정치를 두고 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① 긍정론: 붕당의 폐단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해 안정적 통치를 이루었으며, 균역법·신해통공·수원화성 등 의미 있는 개혁을 이루었다. 정조의 사망만 없었다면 조선의 근대화 가능성을 보여준 시기.
② 비판론: 탕평은 본질적으로 왕권 강화책이지 정치 구조의 개혁이 아니었다. 왕이 강력하지 않으면 작동하지 않는 시스템이었고, 실제로 정조 사망 후 곧바로 세도 정치로 변질되었다. 진정한 정치 개혁이라면 제도 자체의 변화—예를 들면 신권의 합리적 분점, 사대부 외 세력의 제도적 참여—가 있어야 했다.
오늘날에는 두 시각을 종합해 "제한적 가능성을 보였으나 구조적 한계도 분명했던 정치"로 평가한다. 탕평은 조선이 보여줄 수 있던 자체적 개혁의 최대치였으나, 그것이 한 사람의 군주에 의존하는 한 지속될 수 없었다.
조선 후기 정치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각 시기를 눌러 확인하세요
정조 사후 60여 년, 조선은 어린 임금들 뒤에서 외척 가문이 권력을 농단한 세도 정치의 시대를 맞았다.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가 번갈아 권력을 장악하면서 정치는 부패의 끝까지 갔고, 그 부담은 농민에게 돌아왔다. 19세기는 크고 작은 봉기의 시대였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고 11세의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그녀의 친정인 경주 김씨 노론 벽파가 일시 권력을 잡았고, 정조가 키운 남인·시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신유박해, 1801).
그러나 정순왕후가 죽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안동 김씨)이 권력을 잡으면서, 본격적인 안동 김씨 세도가 시작된다. 헌종 대(1834~49)에는 풍양 조씨가 잠시 권력을 잡았다가, 철종 대(1849~63) 다시 안동 김씨로 돌아갔다. 약 60년간 두 가문이 정치·인사·재정·과거를 모두 좌우했다.
세도 정치의 폐단은 ① 관직의 매매(매관매직)—돈을 주고 사또 자리를 사고, 그 돈을 회수하기 위해 백성을 수탈, ② 과거의 부패—세도 가문의 자제만 합격, ③ 비변사의 권력 독점—세도 가문이 비변사를 장악해 왕을 무력화, ④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곡 모두 부정으로 가득.
삼정(三政)은 ① 전정(토지세), ② 군정(군포), ③ 환곡(춘대추납의 빈민 구제)이다. 본래 모두 백성을 위한 제도였으나, 세도 정치 하에서 모두 변질되었다.
| 구분 | 본래 제도 | 문란의 양상 |
|---|---|---|
| 전정 | 토지 1결당 4두 | 은결(隱結, 미신고 토지)·진결(陳結, 황무지에 부과)·도결(都結, 잡세를 토지세에 끼워 부과) |
| 군정 | 16~60세 남성 1년 1필 | 황구첨정(어린아이에게 부과)·백골징포(죽은 자에게 부과)·인징(이웃에게)·족징(친족에게) |
| 환곡 |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약간의 이자로 회수 | 본래 환곡이 사실상 고리대로 변질, 강제 분급, 짚을 섞은 곡식 강제 회수, 가공의 환곡 장부 |
세도 정치의 모순이 가장 먼저 폭발한 곳은 평안도였다. 평안도는 ① 중앙 정계에서 차별받았고(평안도 출신은 고위 관직 진출이 막힘), ② 청과의 무역으로 부유했으나 정부의 가렴주구가 심했고, ③ 광산 개발로 광민·상인이 모이는 새로운 사회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1811년(순조 11) 12월, 몰락 양반 홍경래가 광산 노동자·소상인·일부 농민을 모아 가산에서 봉기. 한 달 만에 평안도 8개 군을 점령했고, 4개월간 정주성에서 농성하며 항전. 1812년 4월 결국 진압되었으나, 이는 지방 차별과 세도 정치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의 시작을 알렸다.
홍경래의 난 후 50여 년 뒤, 1862년(철종 13) 진주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의 가혹한 수탈에 분노한 농민들이 몰락 양반 유계춘의 지도로 봉기. 진주에 이어 전국 70여 개 지역에서 잇따라 봉기가 일어났으니,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 한다.
정부는 박규수를 안핵사로 파견해 진상을 조사하고,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1862)을 설치해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세도 가문의 반대로 곧 폐지되어 실질적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좌절은 곧이어 등장하는 흥선대원군 개혁의 직접적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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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3년, 12세의 어린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섭정으로 권력을 잡았다. 그는 세도 정치의 폐단을 일거에 척결하려 했고, 동시에 외세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통상수교를 거부했다. 약 10년간의 그의 통치는 조선 후기의 마지막 자체 개혁이었다.
대원군의 첫 번째 목표는 세도 가문의 권력 해체였다. ① 비변사 폐지(1865) 후 의정부·삼군부 부활: 비변사는 세도 가문의 권력 본부였기에 그 해체가 곧 세도 척결의 시작. ② 안동 김씨 등 세도 가문 인사 축출, 노론 외 인재(남인·소론·서북인 등) 등용으로 인사의 폭을 넓힘. ③ 『대전회통』·『육전조례』 등 법전 편찬으로 법치 정비.
특히 주목할 것은 서원 철폐(1865~71)이다. 전국 1,000여 서원 중 47개의 사액 서원만 남기고 모두 철폐. 서원은 양반의 향촌 권력 거점이자 면세·면역의 특권 기구였기에, 그 철폐는 양반 권력의 경제·사회적 기반에 대한 직접 타격이었다. "공자가 살아 돌아와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며 강행한 이 정책으로 대원군은 양반 사대부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대원군은 농민의 부담을 줄이고자 ① 호포제(1871, 양반에게도 군포 부과)와 ② 사창제(1867, 환곡을 향촌 자치 운영으로)를 시행. 양반의 면세 특권을 깨뜨리고 환곡의 부패를 막으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그의 정책 중 가장 큰 부담을 낳은 것은 경복궁 중건(1865~68)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정궁을 270여 년 만에 다시 짓는 대공사.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① 원납전(자발 기부 명목의 강제 헌금)·② 당백전(상평통보의 100배 가치를 갖는다는 명목의 화폐 발행, 사실상 인플레이션)·③ 결두전(1결당 100문의 추가 세금) 등을 동원. 결과적으로 민생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화폐 경제를 교란시켰다.
19세기 중반, 서양 세력의 동아시아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영국·프랑스가 중국을 굴복시키고(아편전쟁), 일본도 미국에 개항(1854)했다. 조선에도 이양선이 빈번히 나타났다.
대원군은 강경한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폈다. 그 배경에는 ① 서양에 대한 정보 부족, ② 천주교에 대한 두려움(전통 질서 위협), ③ 청·일의 굴복 사례에 대한 경각심이 있었다. 1866년 그는 천주교를 박해하고(병인박해) 프랑스 신부 9명과 신자 8천여 명을 처형했다. 이를 빌미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병인양요(1866).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격퇴.
1866년 7월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다 평안 감사 박규수의 공격으로 격침. 이를 빌미로 1871년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신미양요. 어재연이 광성보에서 항전, 전사. 미군도 결국 철수.
대원군은 양요 후 전국에 척화비(1871)를 세웠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니 싸우지 않으면 화친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매국이다)". 그러나 1873년 최익현 등 유생들의 탄핵 상소로 대원군은 실각, 고종이 친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3년 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은 마침내 개항하게 된다.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오랜 논쟁의 주제이다. ① 긍정론: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서양 열강의 침략에 무방비였다. 만약 일찍 개항했다면 더 큰 굴욕(불평등 조약, 영토 침탈)을 당했을 수 있다. 대원군의 거부 정책은 시간을 벌어준 측면이 있다.
② 비판론: 일본은 1854년 개항 후 메이지유신(1868)으로 빠른 근대화를 이루었다. 조선도 더 일찍 개항하고 근대화에 나섰다면 식민지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원군의 폐쇄 정책은 오히려 근대화의 골든 타임을 놓치게 했다.
오늘날 학계는 양쪽 모두 일면적이라 본다. 대원군의 정책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합리적 선택이었으나 장기적으로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더 본질적인 문제는 대원군이 거부만 했지 대안적 근대화의 청사진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일본 사쓰마·조슈의 지사들이 양이와 근대화를 결합한 것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 정치의 변동은 사료에 또렷이 새겨져 있다. 두 사료를 통해 그 결정적 장면을 직접 읽어 보자.
정약용은 강진 유배(1801~1818) 시절 「원목(原牧)」이라는 짧은 글에서 통치의 본질을 근본부터 다시 물었다. 그의 논지는 오늘날 읽어도 놀랄 만큼 급진적이다.
"옛날에는 백성만 있었다. 어찌 목민관(牧民官)이 있었겠는가? 백성들이 갈등이 생기자 모여서 공정한 사람 한 명을 뽑아 이정(里正)으로 삼았고, 여러 마을의 이정이 모여 당정(黨正)을 뽑았다. ⋯ 이렇게 위로 올라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의 우두머리가 되니, 그를 황왕(皇王)이라 한다. 황왕의 근본은 백성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위에서 한 사람을 임명하여 내려보내고, 백성은 그가 누구인지도 모른다. 백성을 위해 목민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목민관을 위해 백성이 짜내지는구나."
— 정약용, 「원목(原牧)」
이 글에서 정약용은 "황왕의 근본은 백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상 인민 주권에 가까운 사상을 펼쳤다. 19세기 초 조선에서 이런 글이 쓰여졌다는 것이 놀랍다. 비록 그의 사상이 당대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500여 권의 저서—『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등—는 한국 실학의 절정이자, 잠재된 근대성의 표현이었다.
| 시기 | 특징 | 핵심 사건 |
|---|---|---|
| 17세기 전반 (인조~효종) | 붕당 정치의 정상 작동, 비변사 비대화 시작 | 인조반정(1623), 양난, 북벌론 |
| 17세기 후반 (현종~숙종) | 예송·환국으로 붕당 정치 변질 | 예송(1659·1674), 환국(1680·89·94) |
| 18세기 (영조~정조) | 탕평 정치—붕당 균형과 왕권 강화 | 균역법(1750), 규장각(1776), 화성(1796) |
| 19세기 전반 (순조~철종) | 세도 정치—외척의 권력 농단, 삼정 문란 | 홍경래의 난(1811), 임술 농민봉기(1862) |
| 19세기 중반 (고종 초) | 대원군 집권—세도 척결·통상수교 거부 | 비변사 폐지·서원 철폐·양요·척화비(187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