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으로 세운 나라는 어떻게 운영되었고, 어떤 도전에 직면했는가?"
1392년 이성계가 즉위함으로써 시작된 조선은 단순히 왕조 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통치 이념의 도입이었다. 불교 대신 성리학이, 권문세족 대신 사대부가, 대농장 대신 과전법이 새 사회의 골격을 이루었다.
이 단원에서는 조선 전기(15~16세기)의 정치 운영을 ① 건국과 통치 체제 정비, ② 사림의 등장과 사화·붕당, ③ 양난(왜란·호란)으로 인한 변동의 세 단계로 살펴본다. 단순히 왕의 업적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유교적 정치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떻게 흔들렸으며, 외부의 충격에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추적하는 것이 핵심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사림 정치의 의미이다. 사림은 단순히 한 정치 세력이 아니라, 조선의 정치를 왕 중심에서 사대부 중심으로 바꾸려 한 거대한 흐름이었다. 사화·붕당·예송·환국·탕평·세도 정치로 이어지는 조선 정치사의 모든 굴곡은 사림의 등장에서 시작된다.
▲ 조선 전기 정치사 4단계 — 이 단원의 큰 골격
조선은 이성계의 군사력과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의 이념이 결합해 세워졌다. 두 세력은 새 왕조의 청사진을 함께 그렸으나, 권력 운영 방식을 두고 갈등하다가 결국 충돌했다. 이 충돌이 조선 초기 정치의 향방을 결정지었다.
1392년 7월 17일 이성계가 즉위하고, 1393년 국호를 '조선'으로 확정했다(고조선 계승 의식). 1394년에는 한양으로 천도했다. 정도전이 새 도성의 설계를 주도했는데, 경복궁(왕궁) 좌측에 종묘(왕실 사당), 우측에 사직(토지신·곡신)을 두는 '좌묘우사(左廟右社)' 원칙을 따랐다. 한양은 풍수지리(주산-진산-안산)와 유교적 도시 계획이 결합된 도시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경제문감』을 저술해 재상 중심의 정치를 구상했다. 왕은 상징적 존재이고 실제 정치는 재상이 운영하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다. 반면 이방원(태조의 다섯째 아들)은 왕권 중심의 정치를 추구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정도전·남은 등을 죽이고 세자(방석)도 제거했다.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으로 방간을 누른 뒤 즉위하니, 이가 태종이다. 태종은 사병을 혁파하고 군권을 왕에게 집중시켰으며, 6조 직계제(6조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보고)·호패법(전국 인구 파악, 1413)·신문고 설치 등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태종이 닦은 왕권 위에서 세종(1418~1450)은 유교 정치의 이상을 펼쳤다. 그는 6조 직계제 대신 의정부 서사제를 채택해 신하들과 협의하는 정치를 펼쳤고, 집현전을 설치해 학자들을 양성했다. 정인지·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이 여기서 배출되었다.
세종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① 1443년 훈민정음 창제, ② 박연의 아악 정비, ③ 장영실의 측우기·자격루·앙부일구 등 과학 기기, ④ 정초의 『농사직설』·『칠정산』(역법) 편찬, ⑤ 4군 6진 개척(최윤덕·김종서), ⑥ 쓰시마(대마도) 정벌(이종무, 1419) 등이 대표적이다.
세조(수양대군, 1455~1468)는 단종을 폐위하고 즉위했다. 정통성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6조 직계제로 돌아가 왕권을 강화했고, 직전법(현직 관리에게만 토지 지급, 1466)으로 국가 재정을 정비했다. 성종(1469~1494)은 세조 이래의 작업을 종합해 1485년 『경국대전』을 완성했다. 6전(이·호·예·병·형·공) 체제로 구성된 이 법전은 조선 500년 통치의 근본 법전이 되었다.
| 구분 | 기구 | 기능 |
|---|---|---|
| 중앙 | 의정부(영의정·좌의정·우의정) | 최고 합의 기관 — 국정 총괄 |
| 6조(이·호·예·병·형·공) | 실무 행정 — 판서·참판·참의 | |
|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 | 사헌부=관리 감찰 / 사간원=간쟁 / 홍문관=경연·학술 — 언론·권력 견제 | |
| 특수 | 승정원 | 왕명 출납 — 왕의 비서실 |
| 의금부 | 왕명에 의한 중죄인 추국 | |
| 지방 | 8도 | 관찰사(감사) 파견 — 경기·충청·전라·경상·강원·황해·평안·함경 |
| 부·목·군·현 | 수령(부윤·목사·군수·현감) 파견 — 향리는 보조 | |
| 군사 | 5위(중앙)·진관체제(지방) | 양인개병 원칙, 16~60세 남성 16개월 정군 또는 보인 |
| 교육 | 성균관·4부 학당·향교·서원 | 유학 중심, 과거 시험 응시 자격 부여 |
조선의 정치 체제는 왕권(王權)과 신권(臣權)의 긴장으로 운영되었다. 6조 직계제(태종·세조)는 왕권 강화책이고, 의정부 서사제(세종·성종)는 신권 존중책이다. 3사의 언론 활동(간쟁·서경·봉박)은 왕권을 견제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학계는 이 균형을 두고 ① '견제와 균형'으로 보는 시각(긍정), ② '무력한 왕권'으로 보는 시각(부정)이 공존한다. 다만 조선의 정치 시스템이 중국·일본에 비해 훨씬 분산된 권력 구조였다는 점은 일치된다. 왕은 절대 군주가 아니라, 사대부와의 합의 속에서 통치했다. 이 합의의 정치 문화가 조선 정치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건국 공신들의 후예인 훈구파에 맞서, 향촌의 새로운 학자 집단인 사림파가 등장했다. 두 세력의 충돌은 네 차례의 사화로 표출되었으나, 사림은 끝내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사림 내부의 분화로 인해 곧 붕당 정치가 시작된다.
훈구파는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공신과 그 후예들이다. 정인지·신숙주·한명회·서거정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중앙의 고위 관직과 막대한 토지를 차지하고 부국강병·실용을 강조했으며, 사장(詞章, 시문)에 능했다.
반면 사림파는 길재의 학풍을 잇는 영남 지역의 학자 집단으로, 지방의 중소 지주이자 유교적 명분과 의리를 중시한 성리학자들이었다. 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이어진다. 이들은 성종 대부터 중앙에 진출해 3사의 언관직을 장악하며 훈구파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훈구와 사림의 갈등은 사화(士禍)—'사림이 화를 입은 사건'—로 폭발했다. 1498년부터 1545년까지 약 50년 사이에 네 차례 일어났다.
무오사화(1498, 연산군)는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중국 항우가 의제를 죽인 일을 빗대 세조의 단종 폐위를 비판한 글)이 발단이었다. 김일손이 사초에 이를 기록한 것을 훈구파(이극돈·유자광)가 폭로해 김종직은 부관참시, 사림 다수가 처벌되었다.
갑자사화(1504, 연산군)는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 사사 사건이 발단이었다. 연산군이 어머니의 죽음에 관여한 사람들을 일거에 숙청. 한명회·정창손 등 훈구는 물론 사림까지 휩쓸려 죽었다. 이는 사림 사이의 분쟁이라기보다 폭군의 자의적 숙청이었다.
기묘사화(1519, 중종)는 사림의 가장 큰 좌절이었다. 중종반정(1506) 후 등용된 조광조는 ① 현량과(천거 과거), ② 향약 보급, ③ 소격서(도교 기구) 폐지, ④ 위훈 삭제(중종반정 공신의 거짓 공훈 삭제) 등 급진 개혁을 추진했다. 위훈 삭제로 위협을 느낀 훈구파가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趙) 사건—나뭇잎에 꿀로 글자를 쓴 뒤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가 드러나게 한 모함—을 일으켜 조광조 등 사림을 숙청.
을사사화(1545, 명종)는 외척 간의 권력 다툼이었다. 중종 사후 인종(장경왕후 윤씨 소생) → 명종(문정왕후 윤씨 소생)으로 왕위가 옮겨가는 과정에서, 윤임(대윤)과 윤원형(소윤) 두 외척이 다툰 결과 사림이 다시 한 번 큰 피해를 입었다.
네 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은 향촌의 서원과 향약을 통해 세력을 보존했다. 명종 후반~선조 초에는 사림이 마침내 중앙 정치를 장악했다. 그러나 권력을 잡자마자 사림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1575년(선조 8), 이조 전랑(인사권을 가진 핵심 자리)의 후임 추천을 두고 김효원(소장 사림)과 심의겸(외척 출신 사림)이 충돌했다.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에 있어 그 일파를 동인,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그 일파를 서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붕당 정치의 시작이다.
이후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1589)을 계기로 남인(이황 학통, 우성전 등 온건)과 북인(조식 학통, 정인홍 등 강경)으로 분화. 서인은 노론(송시열 중심)과 소론(윤증 중심)으로 분화하면서 4색 붕당이 형성되어 갔다.
중요한 것은 붕당이 처음에는 학문적·이념적 차이(이황 vs 이이, 조식 vs 성혼)에 기반한 건전한 정치 그룹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후기에 가서 권력 투쟁으로 변질된 것이지, 본래 붕당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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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말~17세기 초,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기였다.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고,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했다. 두 차례의 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은 조선 사회를 근본부터 흔들었다.
1592년 4월 14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이 부산진에 상륙했다. 정발(부산진)·송상현(동래)이 분전했으나 전사. 일본군 15만여 명은 조총을 앞세워 파죽지세로 북진했고, 5월 3일 한양 점령, 6월 평양을 점령했다.
그러나 곧 전세는 역전되었다. ①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사천·당포·한산도(1592.7) 해전에서 일본 수군을 격파해 보급선을 차단. ②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곽재우(의령)·조헌(금산)·고경명(담양)·유정·휴정 등 승병까지 합세. ③ 1593년 1월 명군이 평양을 탈환(이여송·조승훈)하고, 권율이 행주대첩(1593.2)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1593년 4월 일본군은 한양을 버리고 남쪽으로 후퇴. 명·일 강화 협상이 4년간 진행되었으나 결렬되자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14만 군이 다시 침입했으나, 명·일 연합 수군은 칠천량(1597.7)에서 원균이 대패. 그러나 이순신이 통제사로 복귀해 명량대첩(1597.9, 단 13척으로 일본 수군 격파)으로 전세를 다시 뒤집었다. 1598년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일본군이 철수하는 가운데, 이순신은 노량해전(1598.11)에서 적을 추격하다가 전사했다.
7년 전쟁의 피해는 막대했다. 인구 격감, 경지의 1/3 황폐화, 불국사·경복궁·홍문관 등 문화재 소실, 각종 서적·도자기·인쇄 기술이 일본으로 약탈되었다. 한편 명군의 도움(재조지은, 再造之恩)은 조선의 친명 의식을 강화했고,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를 누르고 에도 막부를 열었다.
전후 광해군(1608~1623)은 중립 외교를 폈다. 명이 후금(만주)을 정벌할 때 1만 3천 명을 파병하면서도 강홍립에게 "정세를 보아 항복하라"고 지시(1619, 사르후 전투). 이는 신흥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현실주의 외교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이를 "재조지은의 명을 배신한 행위"로 비판했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인조를 옹립했다. 새 정권은 친명 배금(親明排金) 정책으로 전환했다.
정묘호란(1627)은 후금이 친명 정책의 조선을 응징하기 위해 침입한 사건이다. 후금군 3만이 평안도까지 진격했고,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두 달간의 항전 끝에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는 강화 조건(정묘조약)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후금이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군신(君臣)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이 거부. 병자호란(1636.12~1637.1)이 일어났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친히 12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할 시간이 없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했으나, 식량 부족과 강화도 함락 소식에 결국 항복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현 서울 송파)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예—를 행했다.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한다. 소현세자·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가고, 척화파 김상헌·홍익한·윤집·오달제 등이 처형되었다.
병자호란의 굴욕을 씻기 위해 효종(1649~1659)은 북벌을 준비했다. 송시열·이완 등을 등용하고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어영청·금위영을 확대했다. 그러나 청은 이미 명을 멸하고 동아시아 최강이 되어 있었고,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1659)으로 북벌은 실현되지 못했다.
다만 효종 대에는 청의 요청으로 두 차례 나선 정벌(러시아 정벌, 1654·1658)에 조총수를 파견하기도 했다. 이는 조선의 군사력이 일정 수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후세에 엇갈린 평가를 받는다. ① 긍정론: 신흥 후금과 쇠퇴하는 명 사이에서 현실적·실용적 외교를 폈다는 점에서 선견지명을 가진 외교로 평가. 만약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고 광해군의 노선이 계속되었다면 호란의 비극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② 비판론: 광해군의 외교는 단순히 외교 문제가 아니었다. 인목대비 폐위, 영창대군 살해 등 권력 남용의 문제가 컸으며, 이것이 인조반정의 근본 원인. 외교 정책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오늘날에는 광해군의 외교 노선 자체는 현실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폭정(폐모살제)이 반정을 자초했다는 종합적 평가가 우세하다. 옳은 정책을 잘못된 방식으로 추진한 통치자의 비극적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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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와 양난은 단순한 정쟁·전쟁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가치관·이념·국제 관계가 부딪친 현장이었다. 사료를 통해 그 의미를 직접 읽어 보자.
이순신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부터 1598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할 때까지 약 7년 동안 매일의 일을 일기로 남겼다. 이것이 『난중일기(亂中日記)』이다. 한산도 대첩(1592년 7월 8일) 직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7월 7일 흐림. ⋯ 적이 견내량에 정박했다는 보고를 들었다. 견내량은 좁고 바위가 많아 큰 배가 싸우기 어렵다. 한산도 앞바다는 넓고 깊으며 사방이 트여 적을 유인하기에 적당하다.
7월 8일 맑음. 새벽에 적의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니,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73척이 모두 따라 나왔다. 학익진(鶴翼陣)으로 적을 둘러싸고 격파하니, 47척을 침몰시키고 12척을 사로잡았다. 적의 함대 대부분이 궤멸했다."
— 이순신, 『난중일기』 임진년 7월 7~8일
한산도 대첩은 단순한 해전이 아니었다. 일본의 수륙병진(수군이 보급선을 따라 북상, 육군이 평양 점령) 전략이 좌절되었고, 이로 인해 평양 이북 진격이 막혔다. 만약 한산도 대첩이 없었다면, 일본군은 의주의 선조까지 추격해 조선이 멸망했을 수도 있다. 『난중일기』는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 왕 | 재위 | 주요 업적 |
|---|---|---|
| 태조 | 1392~1398 | 조선 건국, 한양 천도, 정도전 등용(재상 중심) |
| 태종 | 1400~1418 | 왕자의 난, 6조 직계제, 호패법, 사병 혁파 |
| 세종 | 1418~1450 | 의정부 서사제, 집현전, 훈민정음, 4군 6진, 측우기 |
| 세조 | 1455~1468 | 계유정난(1453), 6조 직계제 복구, 직전법 |
| 성종 | 1469~1494 | 『경국대전』 완성, 홍문관 설치, 사림 등용 |
| 연산군 | 1494~1506 | 무오·갑자사화, 폐위(중종반정) |
| 중종 | 1506~1544 | 조광조 등용 → 기묘사화로 좌절 |
| 명종 | 1545~1567 | 을사사화, 문정왕후 수렴청정 |
| 선조 | 1567~1608 | 사림 집권, 동·서 분당(1575), 임진왜란(1592~98) |
| 광해군 | 1608~1623 | 중립 외교, 인조반정으로 폐위 |
| 인조 | 1623~1649 | 친명 배금, 정묘호란(1627)·병자호란(1636), 삼전도 굴욕 |
| 효종 | 1649~1659 | 북벌 준비, 나선 정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