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왕조 안에서, 누가 권력을 쥐었고 어떻게 그 권력이 옮겨갔는가?"
고려는 단일 왕조이지만, 그 안의 권력은 끊임없이 옮겨갔다. 호족 → 문벌 귀족 → 무신 →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의 다섯 단계는 단순한 인물 교체가 아니라, 고려 사회 구조 자체의 변동이었다. 이 단원에서 우리는 한 왕조 내에서 지배 세력이 어떻게 바뀌었고, 그것이 통치 체제·국제 관계·민중 생활과 어떻게 맞물렸는지를 추적한다.
고려는 또한 다원적 사회였다. 중앙의 귀족 사회 옆에 향·소·부곡이라는 특수 행정 구역이 있었고, 유교·불교·도교·풍수지리가 공존했으며, 송·요·금·원과 끊임없이 외교적 줄타기를 했다. 이 단원에서 강조할 점은 '고려 = 폐쇄적 신분 사회'라는 단순한 도식이 아니다. 고려의 통치 체제는 의외로 유연했고, 그 유연함이 다섯 차례의 지배 세력 교체를 가능하게 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무신정변(1170)이다. 이 사건을 경계로 고려 전기와 후기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된다. 전기의 문벌 귀족 사회가 무너지고, 후기에는 무신·권문세족·신진사대부가 차례로 등장한다. 한 왕조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고 해도 좋다.
▲ 고려 지배 세력 4단계 변천 — 이 단원의 큰 골격
신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호족들이 각지에 할거하였고, 그 가운데 송악의 호족 출신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는 단순한 군사적 정복자가 아니라, 호족 세력의 조율자로서 새 왕조의 토대를 놓았다.
신라 말 진성여왕(9세기 말) 무렵, 중앙의 통제가 무너지자 지방의 호족들이 자립하였다. 견훤은 900년 후백제를, 궁예는 901년 후고구려(태봉)를 세워 신라와 함께 후삼국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궁예의 폭정에 반발한 신하들이 918년 송악(개성)의 호족 왕건을 추대하였으니, 이가 곧 고려의 태조이다.
왕건은 신라에 우호적 정책(친신라 정책)을 펴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936년 후백제 신검을 일리천 전투에서 격파하여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통일 직후 그는 발해 유민까지 포용해 한반도와 일부 만주 일대를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구상했다.
태조는 호족들의 협력 없이는 통치가 불가능했다. 그는 혼인 정책(29명의 부인이 모두 유력 호족의 딸)·사성(賜姓) 정책(공이 있는 자에게 왕씨 성을 내림)·역분전 지급으로 호족을 회유했고, 동시에 기인 제도(호족 자제를 개경에 인질로 둠)·사심관 제도(중앙 관료에게 출신지 통치 책임 부여)로 견제하였다.
그러나 호족의 힘은 여전히 강했다. 광종(949~975)은 노비안검법(956)으로 부당하게 노비가 된 자들을 풀어 호족의 경제·군사 기반을 약화시켰고, 과거제(958, 후주의 쌍기 건의)를 도입해 학문적 능력 중심의 신진 관료를 등용했다. 또한 공복(公服)을 제정하고 황제·연호('광덕'·'준풍')를 사용해 왕권의 위엄을 높였다. 광종의 개혁은 호족 사회에서 중앙집권적 관료 사회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성종(981~997)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중앙에 2성 6부를, 지방에 12목(983)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며, 향리 제도를 정비해 호족을 지방 관료로 흡수했다. 이로써 고려는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국가가 되었다.
고려의 통치 체제는 당·송의 제도를 받아들이되 한반도의 사정에 맞게 변형한 독자적 체제였다. 그 골격은 다음과 같다.
| 구분 | 기구 | 기능 |
|---|---|---|
| 중앙 | 2성(중서문하성·상서성) | 중서문하성=최고 정책 결정(재신·낭사), 상서성=정책 집행(6부 통할) |
| 6부(이·병·호·형·예·공) | 실무 행정 — 상서성 산하 | |
| 중추원·삼사·어사대 | 중추원=군국 기밀·왕명 출납 / 삼사=화폐·곡식 회계 / 어사대=감찰 | |
| 독자 기구 | 도병마사 | 국방·국가 중대사 합의(재신·추신) → 후기에 도평의사사(도당)로 확대 |
| 식목도감 | 법제·격식 제정 | |
| 지방 | 5도(일반 행정) | 안찰사 파견 — 양광·경상·전라·교주·서해도 |
| 양계(군사 행정) | 동계·북계 — 병마사 파견(국경 방어) | |
| 군사 | 2군 6위 | 2군(왕 친위)+6위(수도·국경 방어), 무신 정3품 상장군 지휘 |
| 교육 | 국자감(중앙)+향교(지방) | 유학부(국자학·태학·사문학)+기술학부(율·서·산) |
고려 사회의 성격을 두고 학계의 시각은 갈린다. ① 귀족 사회론(이기백 등)은 5품 이상 관료의 자제에게 음서로 관직을 보장한 점, 공음전이 세습된 점, 문벌 가문이 권력을 독점한 점을 들어 고려를 혈연 중심의 귀족 사회로 본다.
② 관료제 사회론(박창희 등)은 과거제를 통해 능력으로 관료를 선발하고, 향리에서 출세한 신진 세력이 끊임없이 진입한 점을 강조하며 능력 중심의 관료 사회로 평가한다.
오늘날 학계는 두 시각을 종합해 '귀족적 관료 사회'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음서와 과거가 공존했고, 혈연과 능력이 모두 작동한 사회였다는 것이다. 단순한 도식보다 두 요소의 긴장과 균형을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각 시기를 눌러 지배 세력의 특징과 정치 변혁을 확인하세요
현종 이후 정치적 안정 속에서 일부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기 시작했다. 이들 문벌 귀족은 음서·공음전·중첩된 통혼으로 지위를 세습했다. 그러나 그들의 독점이 극에 달했을 때, 그들과 대립한 무신들이 정권을 뒤집었다.
문벌 귀족이란 5품 이상 관직자가 여러 대에 걸쳐 배출된 가문을 말한다. 경주 김씨, 경원(인주) 이씨, 해주 최씨, 파평 윤씨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① 음서로 관직 진출의 특권을 누리고, ② 공음전(5품 이상에게 지급된 영구 세습 토지)으로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으며, ③ 왕실과의 중첩된 통혼으로 외척 권력을 행사했다.
특히 경원 이씨는 문종~인종 7대 80여 년 동안 왕실의 외척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이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었고, 그 손자 이자겸은 자신의 두 딸을 예종과 인종에게 시집보내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이자겸의 난(1126)은 외척 권력이 왕권을 넘보다 좌절된 사건이다. 인종이 이자겸을 제거하려 하자 이자겸은 척준경과 함께 궁궐을 불태우고 왕을 유폐했으나, 곧 척준경의 배신으로 실각했다. 이 사건은 문벌 귀족 사회의 동요를 보여준다.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1135)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서경(평양) 출신 승려 묘청은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서경 천도, 칭제 건원, 금국 정벌을 주장했다. 인종이 처음에는 동조했으나 김부식 등 개경파의 반대로 실패하자, 묘청은 서경에서 '대위국'을 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김부식이 1년 만에 진압하였다.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은 결국 1170년 무신정변으로 폭발했다. 의종이 보현원에서 연회를 베푸는 자리에서, 평소 천대받던 무신들(정중부·이의방·이고)이 봉기하여 문신들을 죽이고 의종을 폐위시켰다. 이로부터 100년간 무신정권 시대(1170~1270)가 이어진다.
무신정권 초기에는 정중부 → 경대승(도방 설치) → 이의민의 권력 교체가 잇따랐으나,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하면서 최씨 정권이 4대 60여 년간(1196~1258) 지속되었다. 최충헌은 교정도감(최고 정치 기구)을, 그의 아들 최우는 정방(인사 행정)·서방(문신 자문)·삼별초(군사력)를 설치해 정권을 운영했다.
무신 집권 하에서 농민·천민이 처참한 고통을 겪었다. 김사미·효심의 난(1193), 만적의 난(1198, 최충헌의 사노) 등 봉기가 잇따랐다. 만적은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라며 신분 해방을 외쳤으나 실패했다.
1231년 몽골의 1차 침입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6차례 침입이 이어졌다. 최우는 1232년 강화 천도를 단행하고 장기 항쟁에 들어갔다. 그러나 본토의 백성은 무방비 상태로 약탈당했고, 황룡사 9층 목탑·초조대장경 등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1258년 최씨 정권이 무너지고 1270년 무신정권이 종식되며 개경 환도가 이루어졌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배중손·김통정의 지휘 아래 강화 → 진도 → 제주로 옮겨가며 1273년까지 항쟁을 이어갔다. 삼별초는 본래 최씨 정권의 사병 조직이었지만, 끝까지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자주 의식의 상징이 되었다.
무신정권이 종식되었지만, 그것은 자주의 회복이 아니라 원의 간섭의 시작이었다. 80여 년의 원 간섭기 동안 고려는 부마국(駙馬國)으로 격하되었고, 새로운 권력 집단인 권문세족이 등장했다. 그러나 14세기 중엽, 공민왕의 반원 개혁과 신진사대부의 성장으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1270년 개경 환도 이후 고려는 형식적으로 독립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원의 부마국이었다. 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해야 했고, 왕호는 충렬왕·충선왕·충숙왕·충혜왕처럼 '충'(忠)자 돌림을 써 원에 대한 충성을 표시했다. 묘호의 '조·종'(祖·宗) 대신 '왕'을 쓴 것도 격하의 표시였다.
관제도 격하되어 2성은 첨의부로, 6부는 4사로 통합되었고, 중추원은 밀직사로 바뀌었다. 영토도 빼앗겼다. 쌍성총관부(철령 이북, 화주)·동녕부(서경 일대)·탐라총관부(제주)가 설치되어 직할 통치를 받았다. 원은 또 정동행성(일본 정벌 기구, 후에 내정 간섭 기구화)을 통해 고려의 내정을 간섭했다.
고려는 공녀·환관·매·인삼·금·은을 원에 바쳤다. 특히 공녀 차출은 백성의 큰 고통이었으며, 그 중 일부는 원 황실에서 출세하기도 했다(기철의 누이 기황후 등).
권문세족은 원 간섭기에 새로 부상한 지배 세력이다. 그 구성은 다양했다. ① 전기부터의 문벌 귀족 가문(이씨·최씨 일부), ② 무신정권기에 새로 진출한 가문, ③ 원과의 관계로 부상한 친원 세력(역관·환관·매잡이 등)이 뒤섞였다. 이들은 도평의사사(도당)—원래 도병마사가 확대 개편된 합의 기구—를 장악하고 권력을 행사했다.
권문세족의 가장 큰 문제는 대농장(大農莊)이었다. 이들은 산천(山川)을 경계로 삼을 만큼 넓은 토지를 불법으로 차지했고, 양민을 노비로 만들어 농사를 짓게 했다. 국가의 토지 제도(전시과)가 무너지고, 세금을 낼 백성이 줄어들자 국가 재정도 위기에 빠졌다. 이것이 고려 후기 사회 모순의 핵심이었다.
14세기 중엽, 원이 쇠퇴하고 명이 흥기하는 동아시아 정세 변화 속에서 공민왕(1351~1374)이 즉위했다. 그는 일찍이 원에서 볼모 생활을 하며 원의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 반원 자주 정책을 단행했다. ① 친원파 기철 일파 숙청(1356), ② 정동행성의 핵심 기구(이문소) 폐지, ③ 쌍성총관부 무력 회복(1356, 화주 이북 회복), ④ 몽골식 풍습(변발·호복) 폐지, ⑤ 관제 복구(첨의부 → 2성 6부) 등이다.
내정 개혁도 추진했다. 신돈을 등용해 전민변정도감(1366)을 설치하고, 권문세족이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 주인에게 돌려주려 했다. 이때 신돈은 "성인이 나타나셨다"라며 백성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개혁은 권문세족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고, 노국공주의 사망(1365) 이후 공민왕은 정치적 의욕을 잃었다. 결국 신돈은 1371년 처형되고, 공민왕도 1374년 시해되며 개혁은 미완에 그쳤다. 하지만 공민왕의 시대에 등장한 신진사대부는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신진사대부는 ① 지방 향리 출신, ②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 ③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새 세력이다. 이색·정몽주·정도전·권근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권문세족의 부패와 친원 외교를 비판하며 개혁을 주장했다.
한편 신진사대부는 새로 흥기한 무인 세력 이성계와 손을 잡았다. 이성계는 홍건적 격퇴(1361)·왜구 토벌(황산대첩, 1380)로 명성을 얻은 신흥 무장이었다. 1388년 명이 철령위 설치를 통보하자 우왕과 최영은 요동 정벌을 결정했으나, 이성계는 4불가론(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를 수 없다, ② 여름 농번기 출병의 불리, ③ 왜구의 침범 우려, ④ 장마철 활의 아교가 풀리고 전염병 우려)을 들어 반대했다.
1388년 압록강 하구의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는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하였다. 이것이 위화도 회군이다. 이후 정도전·조준 등 급진파 신진사대부가 과전법(1391)을 단행해 권문세족의 경제 기반을 해체했고, 1392년 마침내 이성계가 즉위하여 새 왕조를 열었다. 고려 474년의 역사가 막을 내린 순간이다.
1392년 조선의 건국은 단순한 왕조 교체일까, 사회 구조 자체의 전환일까? ① 혁명설은 권문세족 → 신진사대부의 교체, 불교 → 성리학의 전환, 대농장 → 과전법의 변화 등을 들어 근본적 단절로 본다. ② 변화설은 신진사대부가 고려 후기에 이미 등장했고, 정치 체제의 기본 골격(2성 6부, 과거제, 향리 구조)이 유지되었다는 점에서 점진적 변화로 본다.
오늘날에는 '고려 말~조선 초'를 한 시기로 묶어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까지의 변화는 결코 한 순간의 혁명이 아니라, 한 세대를 넘는 점진적 전환이었다는 것이다.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은 그 긴 과정의 결정적 매듭이었을 뿐이다.
카드를 눌러 사건의 배경과 의미를 확인하세요
고려의 지배 세력 교체는 단순한 인물의 교체가 아니라, 각 세력이 의지한 이념과 사회적 기반의 변화였다. 사료를 통해 그 변화를 읽어내 보자.
1198년(신종 1), 최충헌의 사노(私奴) 만적이 개경 북산에서 노비들을 모아 봉기를 모의했다. 무신정변 이후 정중부·이의민 같은 천출 출신이 권력을 잡는 모습을 본 그는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王侯將相寧有種乎)"라며 신분 해방을 외쳤다.
"각 가문의 종들이 일제히 일어나 자기 주인을 죽이고 노비 문서를 불사르면, 우리도 공경(公卿)·장상(將相)이 될 수 있다. 왕후장상에 어찌 씨가 있겠는가."
— 『고려사』 권129, 최충헌 열전
그러나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어 만적 등 100여 명이 강물에 던져져 죽었다. 한국사상 최초의 조직적 신분 해방 운동으로 평가된다. 무신 집권기에 이런 봉기가 가능했던 것은 무신정변 자체가 신분 질서의 동요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만적의 외침은 700여 년 뒤 동학 농민운동에서 다시 메아리치게 된다.
| 시기 | 지배 세력 | 기반 | 특징 |
|---|---|---|---|
| 918~1009 | 호족 | 지방 군사력·토지 | 지방 자치적 권력, 태조의 회유책 |
| 1009~1170 | 문벌 귀족 | 음서·공음전·통혼 |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
| 1170~1270 | 무신 | 군사력·교정도감·정방 | 최씨 정권, 농민·천민 봉기, 대몽항쟁 |
| 1270~1351 | 권문세족 | 대농장·도평의사사·원과의 연결 | 원 간섭, 친원파, 노비 확대 |
| 1351~1392 | 신진사대부 | 과거·성리학·지방 향리 | 공민왕 개혁, 위화도 회군, 과전법, 조선 건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