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압의 통치인가, 회유의 통치인가? 그 변화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일제의 35년 식민 통치는 단일한 모습이 아니었다. 1910년대의 무단통치, 1920년대의 이른바 '문화통치', 1930~40년대의 민족말살통치 — 일제는 국제 정세의 변동에 따라 통치 방식을 바꿔 가며 한반도를 지배하였다. 그 변화 뒤에는 제국주의 질서의 흔들림과 일본의 침략 전쟁이 있었다.
이 단원에서는 일제의 통치가 어떻게 변화했고, 그 변화가 한국인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시기별로 살펴본다. 단순히 "잔혹했다"는 평가에 머무르지 말고, 1차 세계대전과 워싱턴 체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라는 국제적 맥락 속에서 각 시기 정책의 의도와 결과를 함께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1920년대의 '문화통치'는 이름과 실제 사이의 간격이 큰 정책이었다. 보통경찰제로 바꾼 동시에 경찰 수를 오히려 늘렸고, 신문 발간을 허용한 대신 검열을 강화했다. 이름과 실제의 어긋남을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이것이 이 단원의 첫 질문이다.
▲ 35년 식민 통치의 네 단계 — 국제 정세에 따라 모습을 바꿔 간 지배
1910년대는 1차 세계대전(1914~18) 직전·중·직후의 격동기였다. 1919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전 세계 식민지의 저항을 자극했고, 한국에서도 3·1 운동이 일어났다. 일제는 무단통치로는 더 이상 한반도를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920년대는 워싱턴 체제(1922) 아래에서 일본이 국제 협조를 표방한 시기였다. '문화통치'라는 이름의 회유 정책이 가능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일본을 직격하면서 정세가 다시 바뀐다. 일본은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으로 침략 전쟁을 확대했고, 한반도는 병참기지이자 인적·물적 동원의 대상으로 재편되었다. 이것이 민족말살통치의 국제적 배경이다.
조선을 강제 병합한(1910.8.29.) 일제는 즉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칼을 찬 헌병이 경찰 업무까지 보는 헌병경찰제도로 한국인을 강압하였다. 이 시기 통치의 키워드는 '강압'과 '공포'였다.
일제는 한반도 통치 기구로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총독은 일본 천황 직속으로 한반도의 입법·행정·사법·군사권을 모두 장악한 독재적 통치자였으며, 일본 의회의 견제도 받지 않았다. 초대 총독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였다.
일제는 헌병경찰제를 도입해 군대(헌병)에게 일반 경찰의 업무까지 맡겼다. 헌병경찰은 즉결심판권을 행사하며 한국인의 일상을 감시·통제했고, 태형(笞刑)이라는 잔혹한 신체형이 한국인에게만 적용되었다. 학교 교사들조차 제복을 입고 칼을 찼다.
일제는 신문지법·출판법·보안법을 동원해 한국인의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박탈하였다.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 등 민족 신문은 폐간되었고,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사실상 사라졌다. 안악사건(1910)·105인 사건(1911)을 통해 신민회 등 비밀 결사를 해산시켰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이 진행되었다.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시행되었지만, 신고주의·기한부 신고의 함정 때문에 신고하지 못한 토지, 왕실·관청 토지, 마을 공동 소유 토지가 모두 총독부로 귀속되었다. 이렇게 빼앗긴 토지의 상당수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 이주민에게 넘어갔다(이 부분은 다음 단원에서 자세히 다룬다).
또한 회사령(1910)으로 회사 설립을 총독부 허가제로 만들어 한국인 자본의 성장을 억압하였다. 한국인은 자본이 있어도 회사를 만들 수 없었다.
3·1 운동(1919)으로 무단통치의 한계가 드러나자, 일제는 사이토 마코토를 새 총독으로 임명해 통치 방식을 바꾸었다. 이른바 '문화통치'이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민족 분열을 노린 더 교묘한 통치였다.
1919년 9월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조선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는 시정 방침을 발표하였다. 핵심은 ①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전환, ② 한국인 관리 임용, ③ 한국어 신문 발행 허용, ④ 회사령 폐지(1920) 등이었다.
표면적 완화와 달리, 실제 통치 강도는 약화되지 않았다. ① 보통경찰제로 전환했지만 경찰 수는 1919년 6,387명에서 1920년 2만여 명으로 3배 이상 증가했고, 경찰서도 736개에서 2,761개로 늘었다. ② 고등경찰이 설치되어 사상 통제와 정치 감시가 강화되었다. ③ 한국어 신문(조선일보·동아일보, 1920)이 허용되었으나, 검열·정간·폐간이 일상이었다(동아일보 4차례 정간, 조선일보 폐간 후 복간 반복). ④ 한국인 관리 임용은 하급 관리에 한정되었고, 핵심 자리는 모두 일본인이 차지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 분열 공작이었다. 일제는 친일파를 양성해 민족 운동 진영을 분열시키려 했다. 이광수의 「민족적 경륜」(1924)에 보이는 '자치론'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타협적 흐름이었다. 일제의 분열 공작 속에서 비타협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결합한 신간회(1927)가 결성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1925년 일제는 일본 본토에서 시행된 치안유지법을 한국에도 적용했다. 이 법은 "국체(천황제)를 변혁하거나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결사"를 처벌하는 법으로, 사실상 사회주의 운동·민족 운동 일체를 탄압하는 도구가 되었다. 1928년 개정으로 최고형이 사형까지 강화되었다.
시기를 선택해 일제가 어떻게 한국을 지배했는지 비교해 보세요
1929년 대공황은 일본 경제를 강타했다. 일본은 이 위기를 전쟁으로 돌파하려 했다. 만주사변(1931)→중일전쟁(1937)→태평양전쟁(1941)으로 침략 전쟁이 확대되면서, 한반도는 병참기지이자 인적·물적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일제는 한국인의 정체성 자체를 지우려 들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 동시에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한국인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라는 구호 아래,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정책은 한층 가속화되었다.
일제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쳤다.
1938년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해 한국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① 지원병제(1938)·학도지원병(1943)·징병제(1944)로 한국 청년을 전쟁터로 끌고 갔다(약 20만 명 동원 추정), ② 국민징용령(1939)으로 약 70만 명의 한국인을 일본·사할린·남양 군도의 광산·공장으로 강제 동원했다, ③ 어린 여성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는 만행을 저질렀다, ④ 공출제도로 쌀·놋그릇·숟가락·교회 종까지 강제로 거두어 갔다.
'문화통치'라는 표현은 일제가 자신들의 정책을 미화하기 위해 만든 말이었다. 학계에서는 이 용어를 그대로 쓸 것인지를 놓고 오랜 논쟁이 있었다. ① 일부 연구자들은 어쨌든 한국어 신문이 허용되고 회사령이 폐지된 것은 사실이므로 '회유 통치'·'유화 통치' 정도의 의미는 있다고 본다. ② 그러나 다수 학계는 '이른바 문화통치' 또는 '기만적 문화통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 근거는 명확하다. ① 경찰 수가 오히려 3배로 늘었고, ② 고등경찰·치안유지법으로 감시·탄압이 강화되었으며, ③ 친일파 양성을 통한 민족 분열 공작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문화통치'는 통치 방식의 본질적 변화가 아니라 전술의 변화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3·1 운동이 보여준 한국인의 저항을 직접 억압하는 방식에서, 친일파를 키워 민족 운동을 안에서 분열시키는 방식으로 바뀐 것뿐이다.
35년의 식민 통치를 세 시기로 나누어 그 핵심 정책과 한국인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한 표로 정리한다. 시기 변화의 국제적 배경을 함께 읽는 것이 중요하다.
| 구분 | 1910년대 무단통치 | 1920년대 '문화통치' | 1930~40년대 민족말살 |
|---|---|---|---|
| 국제 배경 | 한일 강제 병합, 1차 세계대전 | 3·1 운동, 워싱턴 체제, 민족자결주의 | 대공황, 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 |
| 총독 | 데라우치 → 하세가와 | 사이토 마코토 | 우가키 → 미나미 → 고이소 → 아베 |
| 경찰 | 헌병경찰제, 즉결심판권, 태형령 | 보통경찰제(실제 3배 증원), 고등경찰·치안유지법 | 전시 경찰·특고경찰, 사상범 단속 |
| 정치 | 조선총독 독재, 언론·집회·결사 박탈 | 형식적 자치 허용, 친일파 양성·민족 분열 | 황국신민화, 신사참배·창씨개명·조선어 금지 |
| 경제 | 토지조사사업, 회사령(허가제) | 회사령 폐지, 산미증식계획 | 병참기지화, 국가총동원법, 공출·징용·징병 |
| 교육·언론 | 1차 조선교육령(우민화), 한글 신문 폐간 | 2차 조선교육령, 조선·동아일보 허용(검열) | 3차·4차 조선교육령, 조선어 폐지, 신문 폐간 |
'내선일체(內鮮一體)'는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미나미 지로 총독이 본격 내세운 구호이다. "내지(內地, 일본)와 조선(朝鮮)은 한 몸"이라는 뜻으로, 표면적으로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평등을 표방했다.
"내선일체는 반도 통치의 최고 지도 정신이다. ⋯ 조선인이 일본인이 되고, 황국 신민이 되는 것이 그 종착점이다."
— 미나미 지로 총독 시정 연설(1939)
그러나 그 본질은 한국인의 민족 정체성을 지우고,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동화시켜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정치적 장치였다. 평등을 말했지만 '내지=중심, 반도=주변'의 위계는 그대로였다. 진짜 평등이라면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주거나, 조선 총독을 한국인이 맡을 수 있어야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구호만 평등, 실제는 동원과 차별이었다.
일제의 식민 통치 35년(1910~1945)은 단일한 통치가 아니라 국제 정세의 변동에 따라 형태를 달리한 통치였다. 1910년대 헌병경찰의 무단통치는 3·1 운동에 직면해 한계를 드러냈고, 1920년대 '문화통치'는 회유의 외피 아래 친일파 양성과 민족 분열을 노린 더 교묘한 지배였다. 1930년대 이후 침략 전쟁이 확대되자 일제는 한국인의 정체성 자체를 지우려는 민족말살통치와 전시 동원 체제로 나아갔다.
이 모든 변화의 공통점은 한국을 일본 제국의 식민지로 영구히 묶어두려는 의도였다. 통치 방식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 본질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35년 식민 통치를 시기별로 나누어 보는 것은, 그 안에서 일어난 한국인의 저항과 적응의 다양한 결을 더 정확히 읽어내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