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던 그 순간에도 횃불은 꺼지지 않았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그날부터 1910년 강제 병합까지, 6년 동안 한국은 단계적으로 일본에 외교권·재정권·군사권·내정권을 차례로 빼앗겼다. 그러나 그 모든 단계마다 한국인은 의병으로, 계몽으로, 의열 투쟁으로 맞섰다.
이 단원에서는 일제 국권 침탈의 5단계 — 한일 의정서(1904) → 1차 한일 협약(1904) → 을사늑약(1905) → 정미 7조약(1907) → 한일 강제 병합(1910) — 을 살펴보고, 이에 맞선 국권 수호 운동의 세 갈래 — 의병 전쟁, 애국 계몽 운동, 의열 투쟁 — 을 함께 들여다본다.
이 시기를 단순히 '망국의 역사'로만 보면 절반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 패배했는가를 묻는 것 못지않게, 그럼에도 무엇이 남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의병의 격렬한 저항, 신민회의 비밀결사, 안중근의 단호한 행동 — 이 모든 것은 후일 임시정부와 무장 독립군의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국권은 빼앗겼지만, 국혼(國魂)은 살아 있었다.
▲ 침탈과 수호의 네 흐름 — "왜 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남았는가"
국권의 상실은 단번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시작된 6년 간의 단계적 침탈이었다. 그 한 단계 한 단계는 모두 '조약'의 형식을 띠었지만, 실은 모두 군사적 위협 하의 강요였다.
1904년 2월 8일, 일본 함대가 인천 앞바다와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며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사실상 한반도와 만주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사전에 영국과 영일 동맹(1902),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을 맺어 외교적으로도 준비를 마쳤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1905.9 포츠머스 조약).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했고,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양도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국제적 견제 장치가 사라졌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해 한일 의정서를 강요했다. 한국 영토 내에서 일본의 군사 행동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필요한 곳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사실상 한국 전 영토의 일본 군사 사용 허가였다.
1904년 8월, 일본은 제1차 한일 협약(외국인 용빙 협약)을 강요했다. 일본인 재정 고문(메가타 다네타로)과 외국인 외교 고문(미국인 스티븐스)을 두게 한 것이다. 두 고문은 한국의 재정·외교를 사실상 좌우했다. 이때 시작된 메가타의 화폐 정리 사업(1905)이 한국 경제를 일본 자본의 손에 넘겼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1905년 11월,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군대를 이끌고 한성에 들어와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을 강요했다. 11월 17일,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한 가운데 열린 어전 회의에서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을사오적) 등 5명의 대신이 조약에 찬성했다. 고종은 끝내 옥새를 누르지 않았지만, 일본은 박제순(외부대신)의 도장만으로 조약 체결을 강행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날에 목 놓아 통곡한다)을 게재해 이 조약의 부당함을 알렸다. 황성신문은 즉시 정간되었고, 장지연은 투옥되었다. 민영환·조병세 등은 자결로 항거했고, 한성 시민들은 종로에서 통곡했다.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헤이그 특사).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1907.7.20),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1907.7.24)을 강요해 차관 정치(통감이 한국 내정에 직접 간섭)·한국군 해산(1907.8)을 단행했다. 이로써 한국의 자위력은 완전히 박탈되었다.
이어 1909년 7월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하고, 1910년 6월 경찰권까지 가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한국 총리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한일 병합 조약이 조인되었다. 8월 29일 순종의 강제 양위 형식으로 조약이 공포되어 대한제국이 멸망했다(경술국치).
단계를 클릭하면 조약의 본문과 해설을 볼 수 있습니다
국권 침탈의 매 단계마다 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을미의병(1895), 을사늑약에 항거한 을사의병(1905), 군대 해산 후 의병 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1907) — 세 차례의 의병 운동은 한국 근대 무장 저항의 첫 단계이자, 후일 독립 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와 단발령에 분노한 유생들이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자"는 기치 아래 봉기했다. 유인석(제천)·이소응(춘천)·허위(경상도) 등 유학자가 이끌었고, 농민·동학 잔여 세력이 가담했다.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후 고종이 단발령을 철회하고 의병 해산을 권고하자 대부분 해산했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최익현(전북 태인, 1906)·민종식(충남 홍주성, 1906)·신돌석(평민 출신, 경북 영덕) 등이 이끌었다. 특히 신돌석은 평민 의병장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병 운동의 사회적 확산을 보여 준다.
최익현은 일본의 죄목 16개를 들어 봉기했으나 곧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 단식 끝에 1906년 11월 순국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인의 항일 의지를 결집시킨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1907년 8월 한국군 해산은 의병 운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해산된 군인들(약 8,800명)이 무기와 함께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은 유생·평민 중심에서 군대 출신을 포함한 정규 무장 세력으로 발전했다. 이를 정미의병(또는 의병 전쟁)이라 부른다.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1907년 12월 결성된 13도 창의군이다.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이 이인영(총대장)과 허위(군사장)의 지휘 아래 약 1만 명의 연합 부대를 조직했다. 1908년 1월 동대문 외곽까지 진군해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우월한 화력과 이인영의 부친상 등으로 좌절되었다.
서울 진공 작전 실패 후에도 의병 운동은 1908~1909년 절정에 이르렀다. 일본 측 통계로도 1908년 한 해 동안 약 1,977회의 교전과 8만 2,767명의 의병 참여가 기록된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일본군이 단행한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호남 일대 의병이 궤멸되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연해주로 이동해 독립군의 모체가 되었다.
의병 운동은 결국 일본군의 압도적 화력 앞에 패배했다. 그렇다면 그 의의는 무엇인가?
① 군사적 의의: 1907~1910년 의병은 약 14만 명이 참전해 약 3,600회 교전, 한국인 1만 7천여 명·일본군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의 식민지화에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게 했다.
② 정신사적 의의: "국혼(國魂)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팎에 알린 사건이다. 매켄지의 책 등을 통해 한국이 일본에 굴종적으로 합병된 것이 아니라 격렬히 저항했다는 사실이 국제 사회에 알려졌다.
③ 독립 운동사적 의의: 남한 대토벌 후 만주·연해주로 이동한 의병이 홍범도·이범윤·유인석 등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군의 모체가 되었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의병의 유산 위에서 가능했다.
한계도 분명하다. 의병 지도부 사이의 신분 갈등(유생과 평민 의병장), 통일된 지휘 체계 부재, 무기·물자의 절대 부족 등은 의병이 정규 전쟁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 한계가 되었다. 그럼에도 의병은 한국 근대 무장 저항의 시원(始原)으로서 그 가치가 부정되지 않는다.
의병이 무장 저항이었다면, 애국 계몽 운동은 "교육·산업·언론으로 실력을 길러 국권을 회복한다"는 점진적 길이었다. 사회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주도했으며, 그 정점에 신민회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 결성된 보안회를 시작으로, 1905년 헌정연구회(이준·양한묵), 1906년 대한자강회(윤효정·장지연), 1907년 대한협회 등 다양한 계몽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신문 발행, 강연회 개최, 학교 설립 등을 통해 국민 의식을 고취했다.
대한자강회는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가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후신인 대한협회는 점차 친일적 색채를 띠며 변질되었다 — 이는 합법적 공간에서 활동한 단체의 한계였다.
합법 단체들이 통감부에 의해 좌절되자, 1907년 4월 안창호·양기탁·이회영·이승훈 등이 신민회(新民會)를 비밀 결사로 조직했다. 회원은 약 800명에 달했고, 양기탁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를 사실상의 기관지로 활용했다.
신민회의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신민회는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양기탁·이승훈 등 700여 명이 검거되어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 일가는 경학사·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 독립 운동의 토대를 닦았다.
의병과 계몽 외에 또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직접 행동으로 일제 침략의 거두를 처단하는 의열 투쟁, 그리고 사라지는 역사를 기록하여 국혼(國魂)을 지키려 한 학자들이다.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부두에서 전명운·장인환이 외교 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를 저격했다. 스티븐스는 미국에서 "한국인은 일본의 보호를 환영한다"는 거짓 발언을 한 친일 미국인이었다. 두 의사는 서로 사전 모의 없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거사했다 — 그만큼 한국인의 분노가 컸음을 보여 준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사살이다.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재무장관과 회담하러 온 이토를 총 3발로 사살했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치며 체포되었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되었다(향년 31세).
이재명은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이완용 사상 사건). 1910년 9월 처형되었다. 이외 한일 강제 병합 직후 황현은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했다 — "글 아는 사람 노릇이 진정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
국권을 잃을 위기에 처한 시기, 학자들은 역사 서술을 통해 민족 정신을 지키려 했다. 신채호와 박은식이 그 대표자이다.
신채호는 1908년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며 한국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한국사의 주체를 '민족(民族)'으로 새롭게 설정하고, 단군에서 시작해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 정통론"을 주장했다. 신라 중심의 기존 사관을 비판하며, 일제의 식민사관에 정면으로 맞섰다.
박은식은 1915년 중국에서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출판해 일제의 침략 과정과 한국인의 저항을 기록했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國猶形也 史猶魂也). 나라의 형체는 무너졌어도 정신은 살아 있다면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한국인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었고, 일제에 의해 금서가 되었다. 박은식은 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도 저술했다.
이외 최남선은 1908년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같은 신체시를 발표해 근대 문학의 새 장을 열었다. 유길준은 1895년에 이미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출판해 서양 문물을 체계적으로 소개했다(한글 사용).
한 시기 한국인은 세 갈래 길을 걸었다 — 의병의 무장 저항, 신민회의 실력 양성, 안중근의 직접 행동. 어느 길이 옳았는가?
① 의병 운동의 한계와 의의: 비록 압도적 화력 차이로 패배했지만, 한국이 굴종적으로 식민화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줬다. 만주·연해주로 이동한 의병이 후일 독립군의 모체가 되었다.
② 애국 계몽 운동의 한계와 의의: "실력을 길러 국권을 회복한다"는 점진주의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으로 일부 단체가 친일로 변질되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신민회의 비밀결사와 만주 독립 기지 건설은 후일 독립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학교 교육은 새로운 세대를 양성했다.
③ 의열 투쟁의 한계와 의의: 개인의 영웅적 행동만으로 국권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이토 사살은 한국 민족의 결의를 세계에 알린 결정적 사건이었고, 후일 의열단·한인애국단 등 독립 운동의 한 흐름을 이루었다.
오늘날 역사 학계의 평가는 "세 흐름은 대립이 아니라 보완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한 길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셋이 합쳐져 한국 독립 운동의 다층적 구조를 만들었다. 1919년 3·1 운동에서 세 흐름은 마침내 만나게 된다.
탭으로 의병·계몽·의열·국혼 4가지 영역의 주요 인물을 살펴보세요
그 시대의 사료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직접 마주해 보자.
안중근(1879~1910)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행위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일본인 검찰관과 면담하면서 "동양 평화"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사형 집행(1910.3.26) 전까지 미완의 저작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했다.
"오늘날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점차 침투하니, 동양의 황인종이 합심·합력하여 이를 막아야 함은 어린아이도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 일본은 같은 인종인 이웃 나라(조선·청)를 깎고 약탈하여, 자신의 친구(우방)를 잘라먹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
만약 일본이 진정 동양 평화를 원한다면 마땅히 세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
첫째, 뤼순(旅順)을 청에 돌려주어 동양 평화의 영구한 근거지로 삼고, 한·청·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할 것.
둘째, 동양 평화 회의를 조직하여 한·청·일 대표가 매년 만나 공동의 문제를 논의할 것.
셋째, 한·청·일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공동 화폐를 발행하여 동양 경제의 자립을 도모할 것.
이것이 진정한 동양 평화이며, 일본·청·한 3국이 서로 침범하지 않고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 안중근,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 (1910년 옥중 미완성 유고)
이 글은 단순한 의병의 격문이 아니라, 100년 후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의 사상적 선구로 평가된다. EU의 유럽석탄철강공동체(1951)·유로화(2002)와 안중근의 "공동 화폐" 구상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휘호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은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압축한다. 그의 행위와 사상은 오늘날까지 한·중·일 어디서든 의의를 인정받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 연·월 | 침탈 | 수호 운동 |
|---|---|---|
| 1904.2 | 러일전쟁 발발·한일 의정서(군사 사용권) | 보안회(황무지 개간권 저지) |
| 1904.8 | 1차 한일 협약(고문 정치) | — |
| 1905.7 | 가쓰라-태프트 밀약(미·일) | — |
| 1905.9 | 포츠머스 조약(러·일) | — |
| 1905.11 | 을사늑약(외교권 박탈·통감부) | 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 민영환 자결, 을사의병 |
| 1906~07 | 통감부 통치 | 대한자강회, 신민회 결성(1907.4) |
| 1907.6 | — | 국채보상운동 절정, 헤이그 특사 |
| 1907.7 | 고종 강제 퇴위·정미 7조약(차관 정치) | — |
| 1907.8 | 한국군 해산 | 정미의병(의병 전쟁) |
| 1907~08 | — | 13도 창의군·서울 진공 작전(1908.1) |
| 1908.3 | — | 장인환·전명운, 스티븐스 저격(샌프란시스코) |
| 1909.7 | 기유각서(사법권 박탈) | — |
| 1909.9~10 | 남한 대토벌 | — |
| 1909.10 | — |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사살(하얼빈) |
| 1910.6 | 경찰권 박탈 | — |
| 1910.8.22 | 한일 병합 조약 조인 | 황현 절명시 4수 자결 |
| 1910.8.29 | 경술국치(대한제국 멸망)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