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 우리는 어떻게 민주공화국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었는가?
제헌헌법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선언했지만, 그 선언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40년의 시간과 수많은 피가 필요하였다. 4·19 혁명에서 6월 민주항쟁까지, 시민과 학생들은 거리에서 헌법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
이 단원에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이승만 정부의 장기 집권 시도부터 박정희 유신체제, 전두환 정부의 5공화국 헌법, 그리고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결실인 9차 개헌까지 — 헌법 개정사가 곧 민주화의 역사이다.
단순히 정치 지도자나 사건만 외우는 것을 넘어, 다음 질문을 함께 던져보자. 한국의 권위주의 정권은 어떻게 그토록 오래 지속될 수 있었는가? 시민들은 어떻게 그것을 이겨냈는가? 우리가 가진 민주주의는 무엇으로 이루어졌고,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 한국 민주화의 4단계 — 이 단원의 핵심 흐름
민주화의 길에는 권위주의 권력자들과, 그 권력에 맞선 시민·학생들이 있었다. 두 부류의 이야기를 함께 살펴야 민주화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제헌헌법은 대통령 임기를 4년 1회 중임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두 차례의 개헌으로 장기집권을 시도하였고, 1960년 3·15 부정선거에서 한계에 도달하였다.
1952년 6·25 전쟁이 한창인 부산 임시수도에서 발췌개헌(1차 개헌)이 강행되었다. 국회에서 선출하던 대통령을 직선제로 바꾼 것이다. 임기 만료를 앞둔 이승만이 국회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자 직선제로 우회한 것이었다. 야당 의원들을 공비와 내통한 혐의로 강제 연행하는 '부산 정치 파동'을 일으키며 통과시켰다.
1954년에는 사사오입 개헌(2차 개헌)이 일어났다.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이 국회에서 1표가 모자라 부결되었으나(찬성 135표/3분의 2 = 135.33⋯), 자유당은 "사사오입(반올림 하면 135)"이라는 억지 논리로 통과를 선언하였다. 이로써 이승만은 3선이 가능하게 되었다.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은 3선에 성공했지만, 야당 후보 신익희는 선거 운동 중 사망했고 부통령에는 야당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진보당 당수 조봉암은 216만 표(31.7%)를 얻으며 돌풍을 일으켰지만, 1958년 진보당 사건으로 간첩 혐의를 받아 사형당하였다(2011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부는 노골적인 3·15 부정선거를 자행하였다. 4할 사전 투표, 3인조·9인조 공개 투표, 야당 참관인 축출, 투표함 바꿔치기 등 모든 부정이 동원되었다. 결과는 이승만 96%, 부통령 이기붕 80% 득표라는 비정상적 수치였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11일 김주열(17세, 마산상고)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올랐다 — 머리에 최루탄이 박힌 채였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전국이 들끓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 시위가 정치 깡패들에게 습격당하자, 다음 날인 4월 19일 서울·부산·광주 등 전국에서 학생·시민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무대로 향하던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해 약 186명이 사망했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시국 선언을 발표하고 시위에 가담하자 —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 26일 이승만은 마침내 하야하였다.
4·19 혁명 후 허정 과도내각을 거쳐 의원내각제 개헌(3차)이 이루어졌다. 7월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하며 장면 내각(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그러나 민주당 신·구파의 분열, 잇따른 시위(통일 운동, 학원 민주화 등), 경기 불황 속에서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다.
민주적으로 출범한 장면 내각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 등 일부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第一義)"로 한다는 혁명 공약 6항을 발표하며 정권을 장악하였다. 윤보선 대통령은 이를 묵인했고, 미국도 사후 승인하였다.
2년 7개월의 군정 기간 동안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서 한국을 통치하였다. 정당·사회단체 해산, 부정 축재자 처벌, 농어촌 고리채 정리, 중앙정보부(KCIA) 설치(1961.6),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1962~) 등을 추진하였다. 1962년 12월 대통령제와 단원제의 5차 개헌을 통과시켰고, 1963년 10월 대선에서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제3공화국).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의 자금원으로 일본의 청구권 자금을 끌어들이고자 한일협정(한일 기본조약)을 추진하였다. 1962년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윤곽이 잡혔다. 일본은 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 민간 차관 1억 달러를 제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협정의 내용은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명확한 배상이 없었고, 위안부·강제동원 피해자 등 개인의 청구권 문제가 묻혔다. "민족적 자존심을 팔아넘긴다"는 비판이 거셌다.
1964년 3월부터 학생·시민들이 한일협정 반대 시위에 나섰고, 6월 3일에는 서울에서 1만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6·3 항쟁). 박정희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했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었다.
1964~73년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파병하였다. 미국의 요청과 한국의 경제·외교적 필요가 맞물린 결정이었다. 총 32만 명이 파병되었고, 약 5천 명이 전사했다. 베트남 특수(파병 수당, 군수 물자 수출 등)는 약 10억 달러로, 1960년대 한국 경제 성장의 한 축이 되었다.
1967년 박정희는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헌법상 3선이 금지되어 있었다. 1969년 9월 14일, 자유당 의원 등이 본회의장이 아닌 국회 별관 제3별관에 모여 3선 개헌(6차 개헌)을 변칙 처리하였다. 야당과 시민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시킨 것이다.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는 야당 후보 김대중을 95만 표 차로 누르고 3선에 성공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헌법을 사실상 무력화하고 종신 집권의 길을 여는 유신체제를 선포하였다. 한국 현대사에서 권위주의가 가장 극단으로 치달은 시기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 정당·정치 활동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유신헌법(7차 개헌)을 만들어 국민투표로 통과시켰다(11월 21일, 찬성 91.5%).
유신헌법의 핵심은 "한국적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한 종신 대통령제였다. 주요 내용은 ①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임기 6년, 중임 제한 없음), ②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을 추천(유신정우회), ③ 대통령은 긴급조치권으로 헌법을 일시 정지시킬 수 있음, ④ 국회 회기 단축, 국정감사권 폐지 등이었다. 사실상 "대통령이 곧 헌법"인 체제였다.
| 구분 | 3공화국(1962년 헌법) | 유신체제(1972년 헌법) |
|---|---|---|
| 대통령 선출 | 직접 선거 | 통일주체국민회의 간선 |
| 대통령 임기 | 4년, 1차 중임 | 6년, 중임 제한 없음 |
| 국회 | 단원제, 직선 | 1/3은 대통령 추천(유정회) |
| 긴급조치 | 제한적 비상조치 | 대통령의 헌법 정지권(긴급조치) |
| 국정감사 | 있음 | 폐지 |
| 기본권 | 법률에 의한 제한 | 긴급조치로 무제한 제한 |
박정희는 1974년부터 1979년까지 긴급조치 1~9호를 발동하였다. 특히 1975년의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반대를 일체 금지"한 것으로, 비판 발언만으로도 영장 없이 체포·구금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5년간 약 1,400명이 긴급조치로 처벌받았다.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조작되어, 도예종 등 8명이 대법원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 집행되었다(2007년 무죄 재심). 1975년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들의 자유 언론 운동('동아 사태'), 1977년 천주교 사제단의 시국 선언, 1978년 '동일방직 사건' 등에서 종교계·언론계·노동계의 저항이 끊이지 않았다.
1978년 12월 총선에서 야당 신민당이 여당 공화당을 득표율에서 앞섰다(신민당 32.8%, 공화당 31.7%). 유신체제에 대한 민심의 이반이 드러난 것이다. 1979년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가 되어 강경 투쟁 노선을 폈고, 정부는 그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10월 4일)하였다.
이에 분노한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인 부산·마산에서 1979년 10월 16일부터 부마 항쟁이 일어났다. 학생·시민이 거리로 나섰고, 정부는 부산에 비상계엄, 마산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그리고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저격하는 10·26 사태가 일어났다. 18년의 박정희 시대가 한순간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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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부정선거와 김주열 사망에 분노한 시민·학생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4월 19일 시위에서 약 186명이 사망했고, 25일 교수단의 시국 선언 후 26일 이승만이 하야했다.
10·26 직후 한국 사회에는 '서울의 봄'이라 불린 짧은 민주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 봄은 신군부의 등장과 광주의 학살로 끝났다.
10·26 직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2월 12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박정희 시해 사건 연루자로 몰아 무력으로 체포하였다(12·12 사태). 군 내 사조직 '하나회'를 기반으로 한 신군부가 군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는 군부 내부의 쿠데타였다.
1980년 봄, 박정희 사망 후 한국 사회는 민주화를 향한 기대로 들끓었다('서울의 봄').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이 정치 활동을 재개했고, 4월에는 노동자들이 전국에서 임금 인상 시위를 벌였다. 5월에는 대학생들이 "계엄 해제, 신군부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다(5.15 서울역 회군 등).
그러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자정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 활동 금지, 국회 봉쇄, 김대중·김영삼·김종필 체포 또는 가택연금을 단행하였다. '서울의 봄'은 그렇게 끝났다.
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생들이 비상계엄 확대에 항의해 시위에 나섰다. 신군부는 공수특전여단(7·11·3공수)을 투입해 시민·학생을 무차별 진압했다. 곤봉으로 머리를 가격하고, 임산부·노인까지 폭행했다. 광주 시민들은 분노했다.
5월 20일 시민 수십만 명이 거리에 모였고, 21일 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수십 명이 사망했다. 시민들은 무기고를 털어 무장(시민군)하고, 22일 계엄군을 광주 외곽으로 몰아냈다. 27일 새벽까지 시민군은 자치적인 광주를 유지하였다 — 약탈도 폭동도 없었던 질서 있는 자치였다.
27일 새벽, 계엄군이 탱크와 헬기를 동원해 도청을 점령하며 항쟁은 끝났다. 공식 사망자는 약 200명이지만, 실제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2024년 진상규명위는 사망 165명·행불 78명 등 공식 집계). 항쟁 후 김대중은 내란 음모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국제 압력으로 감형).
1980년 9월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0월 27일 5공화국 헌법(8차 개헌)이 국민투표로 통과되었다. 주요 내용은 대통령 7년 단임제, 간선제(대통령선거인단)로, 박정희의 종신 대통령제를 폐지하되 직선제는 부활하지 않았다.
전두환 정부는 강압 통치를 이어갔다. 언론기본법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삼청교육대(약 4만 명)에서 무차별 폭력을 자행했다. 한편 야간 통행금지 해제(1982), 학원 자율화, 컬러TV·프로야구·해외 여행 자유화 등 3S 정책(Sex·Sport·Screen)으로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5·18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민주화 요구는 더욱 거세졌다.
각 개헌의 내용과 그 정치적 맥락을 한눈에 비교해 보세요
1987년 6월, 민주주의를 향한 27년의 행진이 마침내 결실을 맺었다. 두 청년의 죽음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9차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였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사망하였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지만, 2월 부검 결과 물고문 사실이 드러났고 5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추가 은폐 사실을 폭로하였다. "고문 정권 타도하라"는 분노가 들끓었다.
이런 상황에서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였다. "현행 헌법(5공화국 헌법)을 유지하고, 13대 대통령은 현행 헌법에 따라 간선으로 선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전두환 → 노태우로의 군정 연장이었다. 호헌조치는 오히려 시민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야당과 시민운동, 종교계, 학생들이 결집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하고, 6월 10일 6·10 국민대회를 계획하였다. 그런데 그 전날인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중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쓰러졌다(7월 5일 사망).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시민·학생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명동성당에서는 학생들의 농성이 시작되었고, "독재 타도,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가 거리에 가득했다. 넥타이 부대로 불린 사무직 회사원들까지 시위에 합류하며, 정권은 더 이상 시민을 누를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에는 전국 150만 명이, 6월 26일 '평화대행진'에는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6월 한 달간 전국 누적 시위 참가자는 약 500만 명으로 집계된다.
1987년 6월 29일, 여당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시민의 요구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하였다.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었다. 김대중 사면 복권, 언론 자유 보장, 지방자치 부활 등 8개 항이 포함되었다.
6·29 선언 후 여야 합의로 헌법 개정 작업이 진행되어,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찬성 93.1%)로 9차 개헌(현행 헌법)이 통과되었다. 주요 내용은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 헌법재판소 신설, 기본권 강화 등이었다. 12월 16일 직선제로 치러진 첫 대선에서는 야권 분열로 노태우(36.6%)가 당선되었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큰 진전이었다.
4·19에서 6·29까지 27년. 같은 시기 다른 신생국이 빠르게 민주화하거나,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달리, 한국은 27년의 우여곡절을 거쳐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 그 길고 굴곡진 길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① 분단·냉전이라는 구조: 반공이 절대적 가치가 되면서, 권위주의 정권은 "반공 = 안보 = 국가"라는 논리로 비판을 봉쇄할 수 있었다. 4·19 이후 5·16, 유신, 5공화국 — 모두가 "안보 위기"를 명분으로 했다.
② 경제 성장과의 교환: 박정희·전두환 정부는 "고도성장"으로 권위주의의 정당성을 보충했다. "민주주의보다 빵이 먼저"라는 논리가 일정한 호응을 얻었다.
③ 시민 사회의 점진적 성장: 그러나 1960~8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대학생, 노동자, 종교계, 중산층이 차례로 정치 의식을 갖추어 갔다. 1987년 6월 항쟁이 가능했던 이유는 도시 중산층(넥타이 부대)이 학생·노동자와 결합했기 때문이다.
④ 희생의 누적: 김주열·박종철·이한열 등 청년의 죽음과 5·18의 비극이 시민의 양심을 흔들었다. 한국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 민주주의"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한국 민주화의 결정적 장면들이 남긴 사료를 통해, 자유와 민주를 향한 시민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 보자.
1987년 6월 29일, 민주정의당 대표 노태우가 발표한 「6·29 선언」은 6월 민주항쟁의 결실이었다. 8개 항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여야 합의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단행한다.
2. 대통령 선거법을 개정해 공정한 선거를 보장한다.
3. 김대중 사면 복권과 시국 관련 사범의 석방을 단행한다.
4. 인권 침해의 시정과 인간 존엄성 보장.
5. 언론 자유의 보장 — 언론기본법 폐지.
6.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 자치 실시.
7.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 보장.
8. 과감한 사회 정화 — 분권화·자율화 추구.
— 노태우, 「6·29 민주화 선언」(1987.6.29)
이 선언은 한국 민주주의의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같은 해 10월 27일 9차 개헌(현행 헌법)으로 직선제·5년 단임 대통령제가 확립되었고, 12월 16일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되며 한국 민주주의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섰다.
| 시기 | 사건 | 의의 |
|---|---|---|
| 1960.4.19 | 4·19 혁명 | 시민·학생의 첫 민주혁명 / 이승만 하야 |
| 1961.5.16 | 5·16 군사정변 | 박정희 군부 집권 / 군사 권위주의 시작 |
| 1964.6.3 | 6·3 항쟁 | 한일협정 반대 / 시민운동의 부활 |
| 1972.10.17 | 10월 유신 | 유신헌법(7차) / 종신 집권 체제 |
| 1979.10.16~20 | 부마 항쟁 | 부산·마산의 시민·학생 봉기 |
| 1979.10.26 | 10·26 사태 | 박정희 피살 / 유신 종말 |
| 1979.12.12 | 12·12 사태 | 신군부의 군권 장악 |
| 1980.5.18 | 5·18 광주민주화운동 | 신군부에 맞선 시민 항쟁 / 약 200명 사망 |
| 1987.6.10~26 | 6월 민주항쟁 | 박종철·이한열 / 500만 시민 참가 |
| 1987.6.29 | 6·29 선언 | 대통령 직선제 수용 / 9차 개헌 |
| 1987.10.27 | 9차 개헌(현행 헌법) | 직선제·5년 단임 / 한국 민주주의 정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