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보이의 카페와 농민의 들판 — 같은 식민지의 두 풍경."
1920~30년대 한국 사회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의 백화점·전차·영화관에서 모던보이와 신여성이 새로운 일상을 만들고 있었던 한편, 시골과 공장에서는 농민·노동자들이 일제와 지주·자본가의 수탈에 맞서 들고 일어나고 있었다. 도시의 모더니티와 농촌의 저항은 동전의 양면이었다.
이 단원에서는 ① 도시화와 일상의 변동, ② 다양한 운동 주체의 대중 운동, ③ 한글 정리·역사 연구·문학 창작을 통한 민족문화수호 운동을 함께 살펴본다. 특히 운동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중심으로 식민지 사회의 결을 입체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핵심이다.
▲ 식민지 사회·문화의 네 흐름 — 새로운 주체와 정신의 저항
1920~30년대 경성(京城, 식민지 시기 서울의 명칭)은 동아시아의 다른 식민지 수도들과 함께 근대 자본주의 문화의 실험장이었다. 전차가 다니고 백화점이 들어섰으며, 카페·영화관·다방이 거리를 채웠다. 그러나 그 화려함은 식민지 권력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일제는 1912년부터 경성을 식민지 수도로 재편했다. 청계천을 경계로 북촌(한국인 주거지)과 남촌(일본인 거주지·상업 중심지)이 나뉘었다. 본정통(本町通, 현재의 충무로)·황금정(黃金町, 현재의 을지로)은 일본인 상권의 중심이었고, 한국인 상권은 종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화신백화점, 동아일보 사옥).
주요 근대 시설로는 ① 1899년 첫 운행을 시작한 전차(서대문~청량리), ② 1926년 완공된 경성역사(현재의 서울역 구역사, 르네상스 양식), ③ 1916년 시공한 경성부청사(현재의 서울도서관), ④ 1926년 광화문 자리에 들어선 조선총독부 청사, ⑤ 1930년 문을 연 미쓰코시 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등이 있다.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사이 신여성·모던보이가 등장하였다. 신여성은 단발머리에 양장(혹은 개량한복)을 입고 학교 교육을 받은 여성들로, 나혜석(화가·작가)·김명순(시인)·윤심덕(성악가) 등이 대표적이다. 모던보이는 양복·중절모·구두로 차려입고 카페·다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도시 남성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이들의 등장은 단순한 패션의 변화가 아니었다. 전통적 가족 제도와 여성 차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주체의 등장이기도 했다. 나혜석이 1934년 발표한 「이혼고백서」는 여성의 성·결혼·이혼에 대한 자율권을 주장한 한국 최초의 페미니즘 선언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들 신여성은 보수적 사회의 비난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비극적 결말을 맞은 경우가 많았다.
1920년대를 거치며 한국인의 일상이 크게 달라졌다. ① 의복: 양복·양장이 도시 중산층 사이에 보급되었고, 한복도 단순화되었다(여성의 짧은 저고리·긴 치마). ② 음식: 일본식 김치(다쿠앙)·우동·돈가스, 서양식 빵·커피가 들어왔다. ③ 주거: 도시에는 일본식 가옥(다다미방·미닫이문)과 서양식 양옥이 들어섰고, 1930년대에는 문화주택(소형 양옥)이 중산층의 꿈이 되었다. 그러나 한국인 절대 다수는 여전히 한옥에서 살았다.
1920~30년대 경성의 모더니티는 화려했지만, 그 혜택을 누린 사람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① 본정통의 백화점과 카페는 주로 일본인과 소수 한국인 부유층의 공간이었고, ② 한국인 다수는 청계천 북쪽의 좁고 더러운 골목에서 살았다. ③ 같은 도시 안에서도 '두 개의 세계'가 공존했다.
경성을 '아시아의 파리'로 부르는 일제와 일부 친일 지식인의 평가와는 달리, 한국인 비평가들(임화·이태준·박태원)은 경성의 모더니티가 가진 식민지적 한계와 위선을 비판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이 보여 주는 도시 산책자의 우울한 시선은, 식민지 도시 모더니티의 그늘을 잘 드러낸다.
1920년대는 한국 대중운동의 폭발기였다. 3·1 운동의 경험이 다양한 운동 주체를 일깨웠고,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은 그 운동에 이론적 무기를 더해 주었다. 농민·노동자·학생·여성·백정·어린이 — 식민지 사회의 모든 주체가 일어났다.
토지조사사업 이후 농민의 대부분이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소작료(수확량의 50~70%)·고리 사채·각종 잡세에 짓눌렸다. 1920년대에는 전국적으로 소작쟁의가 폭발했다. 1920년대 전반에 1만여 건, 1930년대 전반에 7만여 건의 쟁의가 기록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암태도 소작쟁의(1923~24)이다. 전남 신안군 암태도 농민들이 일본인 지주 문재철의 7~8할 소작료에 맞서 1923년 9월부터 약 1년간 소작 거부 투쟁을 벌였다. 농민 600여 명이 목포 법원 앞에서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격렬한 투쟁 끝에 소작료 4할로 인하를 쟁취했다. 이는 식민지 농민 운동의 대표적 승리 사례이다.
1920년대 일본 자본의 진출로 한반도에 공장 노동자가 늘어나면서 노동 운동도 본격화되었다. 임금·노동 시간·민족 차별이 핵심 쟁점이었다(같은 일을 해도 일본인은 한국인의 2배 임금).
대표적 사례가 원산 총파업(1929.1~4.)이다. 영국계 라이징선석유회사의 일본인 감독이 한국인 노동자를 구타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원산 노동연합회 산하 3,000여 명의 노동자가 4개월간 총파업에 돌입했다. 일제는 회사 측과 결탁해 파업을 분쇄했지만,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조직적 노동 운동으로 평가된다. 일본·중국·소련의 노동자들도 연대 메시지를 보냈다.
6·10 만세 운동(1926)은 순종(마지막 황제)의 인산일(因山日, 장례일)을 계기로 학생들이 주도해 일으킨 시위. 사회주의 청년 단체와 천도교 측이 사전 준비했으나 일부가 발각되었고, 결국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시위를 이어 갔다. 비록 3·1 운동만큼 확산되지는 못했지만, 학생이 민족 운동의 새 주체로 등장한 사건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민족주의의 통합 필요성이 더 부각되어 신간회(1927) 결성으로 이어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1929.11.3.~1930.3.)은 식민지 시기 최대 규모의 학생 운동이다. 1929년 10월 30일 광주~나주 통학 열차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이 발단이 되었다. 11월 3일(일본 메이지 천황 생일) 광주 시내에서 한·일 학생이 충돌했고, 일제 경찰이 한국인 학생만 검거하자 광주 시내 학교들이 동맹 휴학에 들어갔다. 신간회의 진상 조사와 후원으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320여 학교·5만 4천여 명이 참여했다. 3·1 운동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일 시위였다.
1927년 신간회 결성과 함께 자매 단체로 근우회가 출범하였다. 민족주의·사회주의 여성 운동가들의 통합 조직으로, 회장 김활란, 부회장 유각경 등이 활동했다. 강령은 ① 여성의 정치적·경제적 차별 철폐, ② 농촌 부녀 문맹 퇴치, ③ 인신매매 폐지, ④ 모자(母子) 보건법 제정 등이었다. 약 4년간 60여 지회, 6,000여 명의 회원을 모았으나 신간회와 함께 1931년 해체되었다.
조선 시대 가장 천대받던 신분이 백정(白丁)이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는 폐지되었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계속되었다(별도 호적, 교회·학교에서의 차별 등). 1923년 4월 경남 진주에서 조선형평사(衡平社)가 결성되어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은 인류의 본량"을 외치며 백정 차별 철폐 운동을 전개했다.
형평운동은 일본의 부락민(部落民) 해방 운동인 수평사(水平社) 운동과 연대했고, 1930년대까지 약 10년간 활발히 전개되었다. 단순한 신분 차별 철폐를 넘어, 인권 운동의 시초로 평가된다.
1922년 천도교 청년회 산하 색동회를 결성한 방정환은 1923년 5월 1일을 한국 최초의 어린이날로 제정했다. "어린이를 어른과 같이 인격적 존재로 대우하자"는 운동의 핵심이었다. 방정환은 잡지 『어린이』(1923)를 창간하고, 「어린이 권리 선언」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 5월 5일로 날짜가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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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한국사 왜곡(식민사관)과 한국어 말살에 맞서, 한국인 학자·문인들은 한글 정리·역사 연구·문학 창작을 통해 민족 문화를 지키려 했다. 이는 단순한 학술 활동이 아니라 정신의 독립 운동이었다.
1921년 결성된 조선어연구회는 1931년 조선어학회로 개칭되었다. 핵심 회원은 이극로·이윤재·최현배·이희승·정인승 등. 이들은 ① 한글맞춤법 통일안 제정(1933), ② 표준어 사정(1936), ③ 외래어 표기법 통일(1941), ④ 『우리말큰사전』 편찬 작업(1929~)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 학자 33명을 검거하고, 일부를 옥사시켰다(이윤재·한징 옥사). 사전 원고도 압수되었으나, 1945년 광복 후 서울역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1957년에야 『큰사전』이 완성되었다. 한글 사전의 운명은 한국 민족 문화의 시련을 상징한다.
일제는 한국사를 정체성론·타율성론·당파성론으로 폄훼하는 식민사관을 퍼뜨렸다. 이에 맞서 한국 역사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한국사의 자주성과 발전성을 입증하려 했다.
일제 강점기 문학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라 저항과 표현의 무기였다. 대표 작가·작품은 다음과 같다.
| 작가 | 대표작 | 특징 |
|---|---|---|
|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 | 잃어버린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들녘에 빗대어 노래 |
| 심훈 | 「그날이 오면」, 『상록수』(1935) | 광복의 그날에 대한 갈망과 농촌 계몽 의식 |
| 한용운 | 『님의 침묵』(1926) | '님' 즉 조국과 진리에 대한 깊은 사색 |
| 이육사 | 「청포도」, 「광야」, 「절정」 |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1944년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 |
| 윤동주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1948 유고) |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 옥사. 식민지 청년의 부끄러움과 결의 |
| 김소월 | 「진달래꽃」(1925) | 한국적 정한(情恨)의 서정시 |
| 현진건·염상섭 | 『빈처』·『만세전』 | 식민지 지식인의 무기력과 분노 |
식민지 시기 종교 단체들도 각자의 방식으로 민족 운동에 참여했다.
| 분야 | 대표 사건·단체 | 연도 | 핵심 의의 |
|---|---|---|---|
| 농민 | 암태도 소작쟁의 | 1923~24 | 소작료 4할 인하 쟁취 — 농민 운동 대표 승리 |
| 노동 | 원산 총파업 | 1929 | 최대 규모의 조직적 노동 운동, 국제적 연대 |
| 학생 | 6·10 만세, 광주학생항일운동 | 1926·1929 | 학생이 민족 운동의 주체로 등장, 신간회 활약 |
| 여성 | 근우회 | 1927~31 | 좌우 합작 여성 운동, 강령에 모성 보호·인신매매 폐지 |
| 형평 | 조선형평사 | 1923~30s | 백정 차별 철폐 — 인권 운동의 시초 |
| 어린이 | 색동회·어린이날 제정 | 1922·1923 | 방정환 — 어린이의 인격 존중 운동 |
| 한글 | 조선어학회 | 1931~42 | 맞춤법 통일·표준어 사정·큰사전 편찬 |
| 역사 | 박은식·신채호·백남운·진단학회 | 1915~1934 | 식민사관에 맞선 한국사 자주성·발전성 입증 |
1930년대 경성은 한 도시 안에 두 개의 세계가 공존했다. 청계천을 경계로 남촌(일본인)·북촌(한국인)이 갈렸고, 본정통의 백화점은 일본인과 소수 부유한 한국인의 공간이었다.
"구보(仇甫)는 화신백화점 옥상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연한 거리, 늘어선 빌딩 — 그러나 그 화려함은 자기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풍경이었다."
—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당대 한국 작가들은 경성의 모더니티가 가진 식민지적 한계를 예리하게 포착했다. 박태원의 '구보씨'는 화려한 거리를 산책하면서도 그 풍경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이상의 「날개」(1936)에서 미쓰코시 옥상은 자살을 꿈꾸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일제와 일부 친일 지식인이 경성을 '아시아의 파리'로 미화한 데 반해, 한국인 작가들은 그 화려함의 위선과 그늘을 직시했다.
오늘날 우리는 식민지 모더니티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단순히 '근대화의 성과'로도, '식민 수탈의 부산물'로도 보지 않고, 두 측면을 함께 가진 모순적 현실로 보는 것이 균형 잡힌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