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로운 백성이다." — 1919년 3월 1일, 만세 소리가 한반도를 흔들었다.
일제 35년간 한국인의 민족 운동은 결코 한 갈래의 흐름이 아니었다. 국내의 비밀 결사와 만주·연해주의 독립운동 기지, 중국 관내의 임시 정부와 의열 투쟁, 미주의 외교 활동, 그리고 사회주의 운동의 등장. 그 다양한 길은 때로 갈라지고 때로 합쳐지며 "독립"이라는 한 지점을 향해 나아갔다.
이 단원에서는 ① 1910년대 비밀 결사와 독립 운동 기지 건설, ②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수립, ③ 만주의 무장 독립 투쟁과 의열 투쟁, ④ 민족주의·사회주의의 분화와 신간회 운동까지를 차례로 살펴본다. 단순히 사건의 연표가 아니라, 각 운동의 노선·전략·평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함께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 민족 운동의 네 흐름 — 갈라지고 합쳐진 독립의 길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의 강압으로 공개적 운동이 불가능해졌다. 한국인은 비밀 결사를 만들거나 만주·연해주로 망명해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국내에서 활동한 대표적 비밀 결사는 다음과 같다.
국권 피탈 이전부터 신민회 등이 추진하던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이 1910년대에 본격화되었다. 지리적 가까움과 한인 이주민 공동체를 발판으로, 만주·연해주가 핵심 거점이 되었다.
이회영·이상룡 등이 자기 재산을 처분해 망명한 곳이다. 삼원보(三源堡)를 중심으로 경학사(1911)→부민단→한족회로 자치 기구를 발전시켰고, 신흥강습소(1911)→신흥무관학교(1919)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후일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핵심 전력이 되었다.
한인 이주민이 가장 많이 모인 지역. 용정(龍井)과 명동촌이 중심이었다. 서전서숙(1906, 이상설)·명동학교(1908, 김약연)가 민족 교육을, 중광단(1911)→북로군정서가 무장 활동을 전개했다. 윤동주·송몽규 등 후일 시인·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서 자랐다.
한인 집단 거주지 신한촌이 형성되었다. 권업회(1911)→대한광복군정부(1914) 등이 결성되어 독립 활동을 펼쳤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사회주의 운동도 등장.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로 끌려갔다.
상하이에는 동제사(1912)·신한청년당(1918)이 활동했다.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1910)·흥사단(1913, 안창호)이 외교·교육 활동을 전개했고,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군사 훈련을 시도했다.
1919년 3월 1일, 한반도가 흔들렸다. 약 200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비폭력 평화 운동은 일제 통치의 정당성을 근본부터 흔들었고, 그 정신적 결실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의 출발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3·1 운동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 ① 국제적 배경: 1918년 1차 세계대전 종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14개조 평화 원칙), 러시아 혁명의 영향. ② 국내적 배경: 1919년 1월 고종의 의문의 죽음(독살설 유포)과 국장(國葬) 분위기. ③ 도화선: 1919년 2월 8일 도쿄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조선청년독립단).
천도교(손병희)·기독교(이승훈)·불교(한용운)의 종교계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 대표 33인이 결성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민족 대표들은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같은 시간 학생·민중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는 곧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졌다.
3월 1일 서울·평양·진남포 등 7개 도시에서 동시에 시작된 시위는 3월 중순 이후 농촌으로 확산되었고, 4월에는 전국 218개 시군에서 1,600여 회의 시위가 있었다. 만주·연해주·미주·일본 등 해외에서도 동포들이 동참하였다. 참여 인원은 약 200만 명, 시위 횟수는 1,500여 회, 한국 인구의 약 10%가 직간접으로 참여한 셈이다.
일제는 처음에는 회유했지만 곧 무력 진압으로 돌아섰다. 가장 잔혹한 사례가 제암리 학살(1919.4.15.)이다. 일본군은 화성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 안에 가두고 불을 질러 29명을 학살하였다(스코필드 선교사의 기록으로 세계에 알려짐). 공식 통계만으로도 사망 7,500여 명, 부상 16,000여 명, 검거 47,000여 명에 이르렀다.
3·1 운동 직후 국내외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동시에 수립되었다. 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4.11, 신한청년당 주도), ② 한성 정부(4.23, 국내), ③ 대한국민의회(3.17, 연해주). 세 정부는 1919년 9월 11일 상하이를 무대로 한 통합 임시정부로 합쳐졌다.
임시정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상하이에서 열렸다. 임시정부의 노선을 두고 ① 창조파(임정 해체 후 새 정부 수립)·② 개조파(임정 유지하며 개혁)·③ 유지파(현 체제 유지)로 분열되었고, 결렬되었다. 이로 인해 임정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1925년 이승만이 탄핵되고 박은식이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침체에 빠졌지만, 1931년 김구의 한인애국단 조직과 1932년 윤봉길 의거로 다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1932년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추격을 피해 항저우·전저우·창사·광저우 등을 거쳐 1940년 충칭에 정착하였다. 같은 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1941년에는 대일 선전포고(태평양전쟁 발발 직후), 1944년에는 김구를 주석으로 한 단일 지도 체제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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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에는 외교만으로 부족하다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만주를 무대로 한 무장 독립 투쟁과 일제 요인 처단을 통한 의열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3·1 운동의 영향으로 만주 일대에 한국인 독립군 부대가 활발해졌다. 1920년 6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만주 봉오동에서 일본 정규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봉오동 전투). 같은 해 10월에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이 연합해 만주 청산리 일대에서 6일간 10여 차례 전투에서 일본군 1,200여 명을 살상하는 압승을 거두었다(청산리 대첩).
이에 일제는 간도 참변(1920~21)으로 보복했다. 만주의 한인 마을을 무차별 학살(약 1만 명 살해, 가옥 2,500여 호 소각)하며 독립군의 기반을 무너뜨리려 했다. 독립군은 러시아령 자유시로 이동했으나, 1921년 자유시 참변(러시아 적군과의 무력 충돌로 다수가 사망)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1920년대 중반 만주의 독립군은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3부로 재편되었다. 1930년대 만주사변(1931) 이후에는 한국독립군(지청천, 한·중 연합)과 조선혁명군(양세봉)이 중국군과 협력해 무장 투쟁을 이어 갔다. 그러나 만주국 수립(1932) 이후 활동 공간이 좁아지자, 일부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의열 투쟁은 일제의 핵심 시설 폭파와 요인 처단을 통해 일제의 지배를 뒤흔드는 방식이었다.
1919년 만주 지린에서 김원봉이 조직. "정의(義)는 폭렬(熱)할 것"이라는 행동 강령. 1923년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을 행동 지침으로 삼았다. 대표적 의거로는 ①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1920), ②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파(1921), ③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파(1923), ④ 나석주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파(1926) 등이 있다.
1931년 임시정부의 위기 속에서 김구가 조직. 대표적 의거 둘이 한국사를 흔들었다.
이 외에도 1932년 강우규의 사이토 총독 처단 시도(이미 1919년), 조명하의 일본 황족 처단 시도(1928) 등이 있었다. 의열 투쟁은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일제 통치의 정당성에 균열을 내는 행동이었다.
1920년대 들어 사회주의 사상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왔다. 민족 운동은 민족주의(자치론·실력양성론)와 사회주의(계급 해방·반제 투쟁)로 분화되었고, 두 흐름을 통합하려는 노력의 정점이 신간회였다.
1920년대 민족주의 진영은 ① 타협적 민족주의(자치론)와 ② 비타협적 민족주의로 갈라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가 한국에 영향을 미쳤다.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지만, 일제의 치안유지법(1925)과 4차에 걸친 검거 사건(1925~28)으로 와해되었다. 사회주의는 농민·노동 운동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며 1920~30년대 민중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일제와 타협하지 않는 민족 운동을 위해 좌·우가 하나로 뭉치자." 1926년 정우회 선언(사회주의 진영)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의 연대가 성숙해,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되었다(회장 이상재). 같은 해 5월 자매 단체 근우회(여성)도 출범하였다.
신간회는 ① 광주학생항일운동(1929)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② 농민·노동 운동을 지원했으며, ③ 강연회·민중 계몽 활동을 전개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지원을 위한 진상조사단 파견과 민중 대회 개최가 일제의 탄압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① 내부 좌우 갈등(특히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노선 변화), ② 1931년 만주사변 직후의 위기, ③ 일부 지도부의 자치론적 경향에 대한 불만 등으로 1931년 5월 해체되었다. 그럼에도 신간회는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약 4만 명)의 합법적 민족운동 단체로서 좌우 합작의 가능성을 보여 준 의미 있는 시도였다.
신간회는 4년 만에 해체되었다. 이를 두고 학계의 평가는 엇갈린다. ① 실패론: 좌·우의 노선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해체된 것은 한국 민족 운동의 분열을 드러낸 사건이다. ② 성공론: 4만 명의 합법 조직, 광주학생운동의 전국화 등 가시적 성과를 거두었으며, 좌우 합작의 가능성을 입증한 의의가 크다. ③ 역사적 의의론: 광복 후 좌우 합작 운동(1946~47), 통일 정부 수립 운동(1948)의 사상적·조직적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단기적 결과보다 장기적 영향을 평가해야 한다.
오늘날 학계의 다수 의견은 ②~③에 가깝다. 식민지 시기 좌우 분열의 골이 깊었음을 감안할 때, 신간회의 4년은 결코 짧지 않다. 또한 신간회의 경험은 오늘날 분단된 한반도에서 통합과 화해를 모색하는 데도 시사점을 주는 역사이다.
| 시기 | 국내 | 국외(만주·연해주·중국·미주) | 주요 사건 |
|---|---|---|---|
| 1910s | 독립의군부·대한광복회·송죽회 등 비밀 결사 | 서간도 신흥강습소, 북간도 명동학교, 연해주 권업회 | 105인 사건(1911), 2·8 독립선언(1919) |
| 1919 | 3·1 운동, 학생·여성·노동자 참여 | 3·1 운동의 해외 확산, 임시정부 통합 수립 |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9.11) |
| 1920s 전반 | 물산장려·민립대학설립·문맹퇴치 운동 | 봉오동·청산리 대첩, 의열단 의거 | 봉오동·청산리(1920), 「조선혁명선언」(1923) |
| 1920s 후반 | 6·10 만세 운동(1926), 신간회(1927~31) | 3부 통합, 사회주의 운동 확산 | 광주학생항일운동(1929) |
| 1930s | 조선어학회·민족문화수호 운동 | 한인애국단(이봉창·윤봉길), 한국독립군·조선혁명군 | 윤봉길 의거(1932), 한국광복군 창설(1940) |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1945)는 27년의 망명 생활 동안 끊임없이 거점을 옮겨야 했다. 일제의 추격을 피해, 중국 정세의 변화에 따라.
상하이(1919) → 항저우(1932) → 전저우(1935) → 창사(1937) → 광저우(1938) → 류저우(1938) → 치장(1939) → 충칭(1940~1945)
중요한 전환점은 ① 1932년 윤봉길 의거 — 일제 추격 본격화·국민당 장제스의 공식 지원 시작. ② 1937년 중일전쟁 — 일본군의 진격을 따라 임정도 계속 후퇴. ③ 1940년 충칭 정착 — 중국 임시 수도이자 미·중·소의 연합 거점. 한국광복군 창설, 대일 선전포고(1941), 건국강령 발표(1941), OSS와의 합작(1945)이 모두 충칭에서 일어났다.
임정 요인들은 1945년 11월 23일 충칭에서 미군기 편으로 환국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임정을 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만 인정해, 27년의 합법성 주장은 흩어졌다. 임정의 정통성을 잇는 것은 1948년 제헌 헌법 전문에 "대한민국이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된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