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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한사1-03-04

국권 침탈과 국권 수호 운동

"나라가 망하던 그 순간에도 횃불은 꺼지지 않았다."

영역 1904 ~ 1910 러일전쟁 · 을사늑약 · 의병 · 신민회
VISUAL JOURNEY · 국혼은 살아있다

사진으로 미리 보는 침탈과 저항

정미의병
정미의병(1907) · "자유의 인간으로 죽겠다"
을사늑약 체결
을사늑약 체결 현장(1905)
헤이그 특사
헤이그 특사 3인(1907)
13도 창의군
정미의병 행렬 · 13도 창의군(1907~08)
안창호
도산 안창호 · 신민회·대성학교
최익현
최익현 · 을사의병·대마도 순국

들어가며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그날부터 1910년 강제 병합까지, 6년 동안 한국은 단계적으로 일본에 외교권·재정권·군사권·내정권을 차례로 빼앗겼다. 그러나 그 모든 단계마다 한국인은 의병으로, 계몽으로, 의열 투쟁으로 맞섰다.

이 단원에서는 일제 국권 침탈의 5단계 — 한일 의정서(1904) → 1차 한일 협약(1904) → 을사늑약(1905) → 정미 7조약(1907) → 한일 강제 병합(1910) — 을 살펴보고, 이에 맞선 국권 수호 운동의 세 갈래 — 의병 전쟁, 애국 계몽 운동, 의열 투쟁 — 을 함께 들여다본다.

이 시기를 단순히 '망국의 역사'로만 보면 절반밖에 보이지 않는다. 왜 패배했는가를 묻는 것 못지않게, 그럼에도 무엇이 남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의병의 격렬한 저항, 신민회의 비밀결사, 안중근의 단호한 행동 — 이 모든 것은 후일 임시정부와 무장 독립군의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국권은 빼앗겼지만, 국혼(國魂)은 살아 있었다.

1
외교권 박탈
을사늑약(1905) · 통감부
2
내정·군사 박탈
정미7조약·군대해산(1907)
3
의병·계몽·의열
3갈래 국권 수호 운동
4
국혼은 살아있다
독립군·임시정부로 계승

침탈과 수호의 네 흐름 — "왜 졌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남았는가"

정미의병
정미의병(1907~). 영국 기자 매켄지(F. A. McKenzie)가 1907년 충북 제천 근방에서 촬영한 의병 사진.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의 인간으로 죽겠다"고 한 의병의 말은 그의 책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 기록되었다.
출처 · F.A. McKenzie 촬영 · Wikimedia (PD)

일제의 국권 침탈 — 5단계 시나리오

국권의 상실은 단번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러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시작된 6년 간의 단계적 침탈이었다. 그 한 단계 한 단계는 모두 '조약'의 형식을 띠었지만, 실은 모두 군사적 위협 하의 강요였다.

러일전쟁(1904~1905) — 운명을 가르는 전쟁

1904년 2월 8일, 일본 함대가 인천 앞바다와 뤼순항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며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사실상 한반도와 만주에서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사전에 영국과 영일 동맹(1902),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을 맺어 외교적으로도 준비를 마쳤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1905.9 포츠머스 조약).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중재로 체결된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했고, 사할린 남부를 일본에 양도했다. 이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국제적 견제 장치가 사라졌다.

한일 의정서(1904.2)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해 한일 의정서를 강요했다. 한국 영토 내에서 일본의 군사 행동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필요한 곳을 임의로 사용할 수 있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사실상 한국 전 영토의 일본 군사 사용 허가였다.

제1차 한일 협약(1904.8) — 고문 정치의 시작

1904년 8월, 일본은 제1차 한일 협약(외국인 용빙 협약)을 강요했다. 일본인 재정 고문(메가타 다네타로)과 외국인 외교 고문(미국인 스티븐스)을 두게 한 것이다. 두 고문은 한국의 재정·외교를 사실상 좌우했다. 이때 시작된 메가타의 화폐 정리 사업(1905)이 한국 경제를 일본 자본의 손에 넘겼음은 앞서 본 바와 같다.

을사늑약(1905.11) — 외교권의 상실

1905년 11월, 일본 특사 이토 히로부미가 군대를 이끌고 한성에 들어와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을 강요했다. 11월 17일, 일본군이 궁궐을 포위한 가운데 열린 어전 회의에서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을사오적) 등 5명의 대신이 조약에 찬성했다. 고종은 끝내 옥새를 누르지 않았지만, 일본은 박제순(외부대신)의 도장만으로 조약 체결을 강행했다.

사료 · 을사늑약 본문(1905.11.17)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이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있는 한국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임무를 가지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아니하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지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그 대표자로서 한국 황제 폐하 아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한다."
—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읽기 포인트 — 이 조약으로 한국은 ① 외교권을 박탈당했고(1·2조), ② 통감부가 설치되어(3조) 한국의 외교를 일본이 대행하게 되었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외교권을 잃은 나라는 사실상 주권 국가가 아니다 — 이로써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保護國)으로 전락했다.

장지연은 황성신문 11월 20일자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날에 목 놓아 통곡한다)을 게재해 이 조약의 부당함을 알렸다. 황성신문은 즉시 정간되었고, 장지연은 투옥되었다. 민영환·조병세 등은 자결로 항거했고, 한성 시민들은 종로에서 통곡했다.

헤이그 특사 사건(1907)과 고종의 강제 퇴위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이상설·이준·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다(헤이그 특사).

사료 · 고종이 헤이그 특사에게 준 친서
"짐(朕)이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되었다는 이른바 보호 조약은, 짐이 결코 동의한 적이 없고 옥새를 찍은 적도 없는 것이다. 짐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 만국평화회의에 짐의 특사 세 사람을 보내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만국에 알리고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게 하노라."
— 고종, 「헤이그 특사 위임장」(1907년 4월 20일)
읽기 포인트 — 친서는 ① 을사늑약은 황제의 동의 없이 강요된 것이며, ② 따라서 무효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을사늑약은 국제법상 무효"라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특사들은 회의에 참석조차 못했고,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했다(1907.7).

일본은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1907.7.20), 순종을 즉위시켰다. 이어 정미 7조약(한일 신협약)(1907.7.24)을 강요해 차관 정치(통감이 한국 내정에 직접 간섭)·한국군 해산(1907.8)을 단행했다. 이로써 한국의 자위력은 완전히 박탈되었다.

이어 1909년 7월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박탈하고, 1910년 6월 경찰권까지 가져갔다. 그리고 마침내 1910년 8월 22일, 한국 총리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한일 병합 조약이 조인되었다. 8월 29일 순종의 강제 양위 형식으로 조약이 공포되어 대한제국이 멸망했다(경술국치).

을사늑약 체결 장면
을사늑약 체결 현장(1905.11.17, 중명전). 일본군에 포위된 가운데 강요된 조약이다. 고종은 끝내 옥새를 찍지 않았으나, 박제순의 도장만으로 강행되었다.
출처 · 중명전(서울 중구) · Wikimedia (PD)
헤이그 특사
헤이그 특사 3인. 왼쪽부터 이준·이상설·이위종.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일본의 방해로 회의 참석을 거부당했다. 이준은 헤이그에서 순국했다.
출처 · 독립기념관 · Wikimedia (PD)
▶ 국권 침탈 6년의 다섯 걸음 · 1904 → 1910
1904
러일전쟁
1905
을사늑약
1907.7
헤이그·고종 퇴위
1907.8
군대 해산·정미의병
1910
한일 강제 병합
단계를 클릭해 보세요.
안중근
1879~1910
이토 사살·동양평화론
고종
1852~1919
헤이그 특사
최익현
1833~1906
을사의병장
신돌석
1878~1908
평민 의병장
안창호
1878~1938
신민회·대성학교
박은식
1859~1925
『한국통사』
INTERACTIVE · 국권 침탈 5단계

조약으로 무너진 6년

단계를 클릭하면 조약의 본문과 해설을 볼 수 있습니다

1
1904.2
한일 의정서
2
1904.8
1차 한일 협약
3
1905.11
을사늑약
4
1907.7
정미 7조약
5
1910.8
한일 병합

항일 의병 운동 — 격렬한 무장 저항

국권 침탈의 매 단계마다 의병이 일어났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분노한 을미의병(1895), 을사늑약에 항거한 을사의병(1905), 군대 해산 후 의병 전쟁으로 발전한 정미의병(1907) — 세 차례의 의병 운동은 한국 근대 무장 저항의 첫 단계이자, 후일 독립 운동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을미의병(1895~96) — 첫 번째 봉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와 단발령에 분노한 유생들이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자"는 기치 아래 봉기했다. 유인석(제천)·이소응(춘천)·허위(경상도) 등 유학자가 이끌었고, 농민·동학 잔여 세력이 가담했다. 그러나 1896년 아관파천 후 고종이 단발령을 철회하고 의병 해산을 권고하자 대부분 해산했다.

을사의병(1905) — 외교권 박탈에 분노

1905년 을사늑약 직후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최익현(전북 태인, 1906)·민종식(충남 홍주성, 1906)·신돌석(평민 출신, 경북 영덕) 등이 이끌었다. 특히 신돌석은 평민 의병장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의병 운동의 사회적 확산을 보여 준다.

최익현은 일본의 죄목 16개를 들어 봉기했으나 곧 체포되어 쓰시마섬에 유배, 단식 끝에 1906년 11월 순국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인의 항일 의지를 결집시킨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정미의병(1907~10) — 의병 전쟁으로의 발전

1907년 8월 한국군 해산은 의병 운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해산된 군인들(약 8,800명)이 무기와 함께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은 유생·평민 중심에서 군대 출신을 포함한 정규 무장 세력으로 발전했다. 이를 정미의병(또는 의병 전쟁)이라 부른다.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1907년 12월 결성된 13도 창의군이다.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이 이인영(총대장)과 허위(군사장)의 지휘 아래 약 1만 명의 연합 부대를 조직했다. 1908년 1월 동대문 외곽까지 진군해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했지만, 일본군의 우월한 화력과 이인영의 부친상 등으로 좌절되었다.

서울 진공 작전 실패 후에도 의병 운동은 1908~1909년 절정에 이르렀다. 일본 측 통계로도 1908년 한 해 동안 약 1,977회의 교전과 8만 2,767명의 의병 참여가 기록된다. 그러나 1909년 9월부터 일본군이 단행한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호남 일대 의병이 궤멸되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연해주로 이동해 독립군의 모체가 되었다.

사료 · 의병이 영국 기자에게 한 말(1907)
"우리는 죽을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차라리 자유의 인간으로 죽기를 원합니다. ⋯ 우리는 끝까지 일본인과 싸울 것입니다."
— 매켄지,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1908)
읽기 포인트 — 영국 기자 매켄지는 1907년 충북 제천 근방에서 의병을 직접 만났다. 그가 본 의병은 "허름한 옷에 변변치 못한 무기를 든 농민들"이었지만, 그들의 발언은 어떤 정규군 장교의 말보다 결연했다. 매켄지의 책은 의병의 사진과 함께 영어권에 한국 의병의 존재를 알린 결정적 기록이 되었다.
최익현 초상(채용신 작)
최익현(1833~1906) 초상. 채용신이 그린 초상화. 위정척사파의 대표적 학자로, 1873년 대원군 탄핵 상소, 1876년 강화도 조약 반대 상소(왜양일체론), 1906년 을사의병 봉기 등 평생을 항일 의지로 살았다. 쓰시마섬에서 단식 끝에 순국.
출처 · 채용신 「최익현 초상」 · 보물 · Wikimedia (PD)
1907년 매켄지가 촬영한 정미의병
정미의병(1907). 캐나다 출신 기자 F. A. 매켄지(McKenzie)가 양평 인근 산골에서 직접 만나 촬영한 의병 부대. 1907년 군대 해산 후 의병은 해산 군인을 흡수해 정규 무장 세력으로 발전했고, 13도 창의군이 1908년 1월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했지만 좌절되었다.
출처 · F. A. McKenzie 「The Tragedy of Korea」 (1908) · Wikimedia (PD)
DEEP DIVE · 학계의 쟁점
의병 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의병 운동은 결국 일본군의 압도적 화력 앞에 패배했다. 그렇다면 그 의의는 무엇인가?

군사적 의의: 1907~1910년 의병은 약 14만 명이 참전해 약 3,600회 교전, 한국인 1만 7천여 명·일본군 1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일본의 식민지화에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을 들이게 했다.

정신사적 의의: "국혼(國魂)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안팎에 알린 사건이다. 매켄지의 책 등을 통해 한국이 일본에 굴종적으로 합병된 것이 아니라 격렬히 저항했다는 사실이 국제 사회에 알려졌다.

독립 운동사적 의의: 남한 대토벌 후 만주·연해주로 이동한 의병이 홍범도·이범윤·유인석 등을 중심으로 무장 독립군의 모체가 되었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의병의 유산 위에서 가능했다.

한계도 분명하다. 의병 지도부 사이의 신분 갈등(유생과 평민 의병장), 통일된 지휘 체계 부재, 무기·물자의 절대 부족 등은 의병이 정규 전쟁으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 한계가 되었다. 그럼에도 의병은 한국 근대 무장 저항의 시원(始原)으로서 그 가치가 부정되지 않는다.

DEBATE · 두 갈래 길이 부딪치다
1905~1910 국권 수호 — 의병 무장투쟁 vs 애국계몽 실력양성, 어느 길이 옳았나?
의병 무장투쟁의 길
  • 지금 당장 무력으로 일제에 맞서야 한다
  • "노예로 사느니 자유의 인간으로 죽겠다"
  • 해산 군인 흡수로 의병 전쟁으로 발전
  • 만주·연해주의 독립군 모체
VS
애국계몽 실력양성의 길
  • 먼저 교육·산업으로 실력을 길러야 한다
  • "유신한 자유 문명국"(공화제) 청사진
  • 대성·오산학교, 만주 신흥무관학교
  • 일부 단체의 친일 변질이라는 한계

애국 계몽 운동 — 실력 양성의 길

의병이 무장 저항이었다면, 애국 계몽 운동은 "교육·산업·언론으로 실력을 길러 국권을 회복한다"는 점진적 길이었다. 사회 진화론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주도했으며, 그 정점에 신민회가 있었다.

애국 계몽 단체의 결성

1904년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기 위해 결성된 보안회를 시작으로, 1905년 헌정연구회(이준·양한묵), 1906년 대한자강회(윤효정·장지연), 1907년 대한협회 등 다양한 계몽 단체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신문 발행, 강연회 개최, 학교 설립 등을 통해 국민 의식을 고취했다.

대한자강회는 1907년 고종 강제 퇴위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가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후신인 대한협회는 점차 친일적 색채를 띠며 변질되었다 — 이는 합법적 공간에서 활동한 단체의 한계였다.

신민회(1907~1911) — 비밀 결사의 정점

합법 단체들이 통감부에 의해 좌절되자, 1907년 4월 안창호·양기탁·이회영·이승훈 등이 신민회(新民會)를 비밀 결사로 조직했다. 회원은 약 800명에 달했고, 양기탁이 발행하던 대한매일신보를 사실상의 기관지로 활용했다.

사료 · 신민회의 목적과 강령(1907)
"우리 민족은 신정신(新精神)·신단결(新團結)·신원기(新元氣)·신학술(新學術)·신모범(新模範)·신개혁(新改革)으로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파하고, 새로운 사상·새로운 윤리·새로운 학술·새로운 모범·새로운 개혁으로써 자기 정신을 만들고 자기 단결을 만들어 자기 원기를 양성하고, 신국(新國)을 만들 것이다. ⋯ 우리 신민회의 목적은 우리 한국의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여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발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자유 문명국을 성립케 함이다."
— 안창호, 「신민회 취지서」(1907)
읽기 포인트 — 신민회의 강령에서 주목할 것은 "유신한 자유 문명국"이라는 말이다. 단순한 군주국 회복이 아니라 공화정(자유 문명국)을 목표로 한 한국 최초의 단체로 평가된다. 이는 후일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채택의 사상적 토대가 된다.

신민회의 주요 사업은 다음과 같다.

신민회는 1911년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양기탁·이승훈 등 700여 명이 검거되어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만주로 망명한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 일가는 경학사·신흥강습소(후일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무장 독립 운동의 토대를 닦았다.

도산 안창호(1919)
도산 안창호(1878~1938).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 시기의 모습. 신민회 결성 주역이자 대성학교 설립자. "도산(島山)"이라는 호로 알려진 한국 근대 민족 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미국·중국·국내를 오가며 평생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
출처 · Dosan Ahn Chang-ho in 1919 · Wikimedia (PD)
평양 대성학교
평양 대성학교(1908). 안창호가 신민회의 사업으로 평양에 세운 중등 교육 기관. "건전한 인격을 통해 민족을 구하자"는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을 가르쳤다. 1912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
출처 · Daesong School · Wikimedia Commons (PD)

의열 투쟁과 국혼을 지킨 사람들

의병과 계몽 외에 또 하나의 흐름이 있었다. 직접 행동으로 일제 침략의 거두를 처단하는 의열 투쟁, 그리고 사라지는 역사를 기록하여 국혼(國魂)을 지키려 한 학자들이다.

의열 투쟁 — 침략의 머리를 겨눈 사람들

1908년 3월 2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페리 부두에서 전명운·장인환이 외교 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를 저격했다. 스티븐스는 미국에서 "한국인은 일본의 보호를 환영한다"는 거짓 발언을 한 친일 미국인이었다. 두 의사는 서로 사전 모의 없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거사했다 — 그만큼 한국인의 분노가 컸음을 보여 준다.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토 히로부미 사살이다.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재무장관과 회담하러 온 이토를 총 3발로 사살했다. 안중근은 현장에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외치며 체포되었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되었다(향년 31세).

사료 ·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1910)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사사로운 원한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위함이다. ⋯ 일본이 동양의 맹주가 되려면 먼저 조선과 청을 동등한 동맹국으로 대우하여, 함께 서양의 침략에 맞서야 한다. 그런데 일본은 조선을 침탈하고 청을 능멸하니, 이는 동양의 평화를 깨뜨리는 죄이다. 그래서 내가 이토를 처단한 것이다."
— 안중근,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 (1910년 옥중 미완성 유고)
읽기 포인트 — 안중근의 행위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는 옥중에서 「동양 평화론」을 집필해 조·청·일 3국이 동등한 연합체를 만들어 서양 침략에 대응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가 든 '동양 평화'의 이상은 단지 일본 침략에 대한 비판을 넘어, 100년 후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의 사상적 선구로 평가된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휘호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는 그의 마음을 압축한다.

이재명은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이완용 사상 사건). 1910년 9월 처형되었다. 이외 한일 강제 병합 직후 황현은 「절명시(絶命詩)」 4수를 남기고 자결했다 — "글 아는 사람 노릇이 진정 어렵구나(難作人間識字人)".

국혼을 지킨 학자들 — 한국통사와 독사신론

국권을 잃을 위기에 처한 시기, 학자들은 역사 서술을 통해 민족 정신을 지키려 했다. 신채호와 박은식이 그 대표자이다.

신채호는 1908년 「독사신론(讀史新論)」을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며 한국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는 한국사의 주체를 '민족(民族)'으로 새롭게 설정하고, 단군에서 시작해 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방 정통론"을 주장했다. 신라 중심의 기존 사관을 비판하며, 일제의 식민사관에 정면으로 맞섰다.

박은식은 1915년 중국에서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출판해 일제의 침략 과정과 한국인의 저항을 기록했다.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다(國猶形也 史猶魂也). 나라의 형체는 무너졌어도 정신은 살아 있다면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한국인에게 정신적 위안을 주었고, 일제에 의해 금서가 되었다. 박은식은 후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도 저술했다.

이외 최남선은 1908년 잡지 「소년」을 창간하고 「해(海)에게서 소년에게」 같은 신체시를 발표해 근대 문학의 새 장을 열었다. 유길준은 1895년에 이미 「서유견문(西遊見聞)」을 출판해 서양 문물을 체계적으로 소개했다(한글 사용).

DEEP DIVE · 학계의 쟁점
의병·계몽·의열 — 어느 길이 옳았는가?

한 시기 한국인은 세 갈래 길을 걸었다 — 의병의 무장 저항, 신민회의 실력 양성, 안중근의 직접 행동. 어느 길이 옳았는가?

의병 운동의 한계와 의의: 비록 압도적 화력 차이로 패배했지만, 한국이 굴종적으로 식민화된 것이 아님을 보여 줬다. 만주·연해주로 이동한 의병이 후일 독립군의 모체가 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의 한계와 의의: "실력을 길러 국권을 회복한다"는 점진주의는 사회진화론의 영향으로 일부 단체가 친일로 변질되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신민회의 비밀결사와 만주 독립 기지 건설은 후일 독립 운동의 토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학교 교육은 새로운 세대를 양성했다.

의열 투쟁의 한계와 의의: 개인의 영웅적 행동만으로 국권을 되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안중근의 이토 사살은 한국 민족의 결의를 세계에 알린 결정적 사건이었고, 후일 의열단·한인애국단 등 독립 운동의 한 흐름을 이루었다.

오늘날 역사 학계의 평가는 "세 흐름은 대립이 아니라 보완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한 길만으로는 충분치 않았고, 셋이 합쳐져 한국 독립 운동의 다층적 구조를 만들었다. 1919년 3·1 운동에서 세 흐름은 마침내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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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을 지키려 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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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로 묻는 국권 침탈과 수호

그 시대의 사료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직접 마주해 보자.

CHECK · 사료 해석 ①
다음 사료에서 알 수 있는 1905년 조약의 본질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제1조. 일본국 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 한국이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지휘한다.
제2조. 한국 정부는 금후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아니하고는 국제적 성질을 가지는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을 것을 약정한다.
제3조. 한국 황제 폐하 아래에 1명의 통감(統監)을 두되 ⋯"
— 1905년 11월 17일 체결
해설 — 제시된 조약은 1905년 11월 17일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제2차 한일 협약)이다. ①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1·2조)하고, ② 통감부를 설치한 것(3조)이 핵심이다. 정미 7조약(A)은 1907년 군대 해산, 1차 한일 협약(C)은 1904년 고문 정치, 한일 병합(D)은 1910년 8월의 사건이다.
CHECK · 사료 해석 ②
다음 자료가 보여 주는 단체의 성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우리 신민회의 목적은 우리 한국의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여 국민을 유신케 하며 ⋯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자유 문명국을 성립케 함이다." — 평양 대성학교(1908)·정주 오산학교(1907) 설립, 평양 자기 회사·태극서관 운영, 만주 삼원보 독립 기지 건설."
— 안창호·양기탁 등이 1907년 결성
해설 — 제시된 단체는 1907년 안창호·양기탁 등이 결성한 신민회이다. ① 비밀 결사 형태로 조직되었고(통감부 탄압을 피하기 위함), ② "유신한 자유 문명국"이라는 강령에서 알 수 있듯 단순한 군주국 회복이 아닌 공화제 국가를 목표로 한 최초의 단체이다. 대성·오산학교 설립, 태극서관·자기회사 운영 등 교육·경제 자급 사업, 만주 삼원보에 독립 기지 건설을 추진했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사실상 해체되었으나, 그 사상은 1919년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채택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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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침탈의 6년 — 시간 순으로 배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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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 수호 운동의 인물과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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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안중근
안창호
박은식
신돌석
최익현
업적·키워드
을사의병·대마도 순국
신민회·대성학교·흥사단
평민 의병장·"태백산 호랑이"
이토 사살(1909)·동양평화론
『한국통사』·혼(魂)을 지키다
맞힌 짝 · 0 / 5
📖 더 깊이 — 사료 더 보기: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 핵심 원문(1910)

안중근(1879~1910)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행위는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그는 뤼순 감옥에서 일본인 검찰관과 면담하면서 "동양 평화"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사형 집행(1910.3.26) 전까지 미완의 저작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했다.

"오늘날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점차 침투하니, 동양의 황인종이 합심·합력하여 이를 막아야 함은 어린아이도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 일본은 같은 인종인 이웃 나라(조선·청)를 깎고 약탈하여, 자신의 친구(우방)를 잘라먹는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

만약 일본이 진정 동양 평화를 원한다면 마땅히 세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
첫째, 뤼순(旅順)을 청에 돌려주어 동양 평화의 영구한 근거지로 삼고, 한·청·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할 것.
둘째, 동양 평화 회의를 조직하여 한·청·일 대표가 매년 만나 공동의 문제를 논의할 것.
셋째, 한·청·일 공동 은행을 설립하고 공동 화폐를 발행하여 동양 경제의 자립을 도모할 것.

이것이 진정한 동양 평화이며, 일본·청·한 3국이 서로 침범하지 않고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
— 안중근, 「동양 평화론(東洋平和論)」 (1910년 옥중 미완성 유고)

이 글은 단순한 의병의 격문이 아니라, 100년 후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의 사상적 선구로 평가된다. EU의 유럽석탄철강공동체(1951)·유로화(2002)와 안중근의 "공동 화폐" 구상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그가 옥중에서 남긴 휘호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와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은 그의 마음을 가장 잘 압축한다. 그의 행위와 사상은 오늘날까지 한·중·일 어디서든 의의를 인정받는 보기 드문 사례이다.

정리와 탐구

한눈에 보기 — 침탈과 수호의 연표

연·월침탈수호 운동
1904.2러일전쟁 발발·한일 의정서(군사 사용권)보안회(황무지 개간권 저지)
1904.81차 한일 협약(고문 정치)
1905.7가쓰라-태프트 밀약(미·일)
1905.9포츠머스 조약(러·일)
1905.11을사늑약(외교권 박탈·통감부)장지연「시일야방성대곡」, 민영환 자결, 을사의병
1906~07통감부 통치대한자강회, 신민회 결성(1907.4)
1907.6국채보상운동 절정, 헤이그 특사
1907.7고종 강제 퇴위·정미 7조약(차관 정치)
1907.8한국군 해산정미의병(의병 전쟁)
1907~0813도 창의군·서울 진공 작전(1908.1)
1908.3장인환·전명운, 스티븐스 저격(샌프란시스코)
1909.7기유각서(사법권 박탈)
1909.9~10남한 대토벌
1909.10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사살(하얼빈)
1910.6경찰권 박탈
1910.8.22한일 병합 조약 조인황현 절명시 4수 자결
1910.8.29경술국치(대한제국 멸망)
EXPLORE · 탐구해 봅시다

국권 침탈과 수호의 역사가 던지는 질문

守國 마스터
"국권은 빼앗겼지만 국혼(國魂)은 살아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사 2 ·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으로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