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엄숙히 천명한다."
분단은 한국사의 미해결 과제이다. 1945년의 분단이 80년에 이르도록 풀리지 않았고, 그 사이에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갈등의 지층이 쌓였다. 독도와 일본의 역사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영토와 역사를 둘러싼 분쟁은 오늘의 동아시아를 흔드는 진행형 이슈이다.
이 단원에서는 남북 관계의 60년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판문점 정상회담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입증하는 역사적 사료를 살핀다. 또한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 왜곡이 어떤 논리로 전개되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시민 차원에서 동아시아 평화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함께 모색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이 책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서—단군 신화에서 오늘까지 이어진 한국인의 자유·평등·민주·평화의 발자취를 함께 되돌아본다.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를 묻기 위한 준비였다.
▲ 분단 극복과 동아시아 평화의 네 단계 — 이 단원의 핵심 키워드
남북 관계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었다. 화해와 긴장, 만남과 단절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그 곡선의 큰 방향은 분명히 대결에서 대화로의 추세를 보여 왔다. 60년 남북 관계의 핵심 분기점을 함께 보자.
1953년 정전협정 이후 남북은 약 20년간 사실상의 적대 관계를 유지했다. 1968년의 1·21 청와대 습격 사건, 푸에블로호 납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와 미·중 화해 무드 속에서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합의 문서로,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통일 3대 원칙을 천명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냉전 종식의 흐름 속에서 1991년 9월 17일 남북은 UN에 동시 가입하였다. 그동안 서로의 국가성을 인정하지 않았던 두 정부가 국제 사회에서 동등한 회원국이 된 것이다. 같은 해 12월 13일에는 남북 기본 합의서(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었다. 두 정부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평화 공존의 원칙을 약속한 것이다. 이듬해 1월에는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분단 이후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마지막 날 6·15 남북공동선언에 서명하였다. ① 통일 문제의 자주적 해결, ②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 연방제의 공통성 인정, ③ 이산가족·비전향 장기수 문제 해결, ④ 경제·문화 교류 활성화, ⑤ 당국 회담 개최를 5개항으로 합의하였다.
그 결과 금강산 관광(1998 시작, 정상회담 이후 활성화), 개성공단(2003 착공, 2004 가동), 이산가족 상봉(2000~2018, 총 21차례) 등 남북 교류가 본격화되었다. 김대중은 그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나 10·4 남북정상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에 합의하였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종전 선언 추진 등이 담겼지만, 정권 교체로 후속 이행이 어려워졌다.
2018년 3월부터 9월 사이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3차례(4·27 판문점, 5·26 판문점, 9월 평양)에 걸쳐 만났다. 판문점 선언(2018.4)과 평양공동선언(2018.9)을 통해 적대 행위 중지, 동·서해선 철도와 도로 연결, 비무장지대(DMZ)의 평화지대화 등을 합의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사상 처음 열렸다.
1989년 영변 핵시설 의혹이 제기된 이후, 북한 핵 문제는 30년 넘게 한반도 평화의 가장 큰 장애였다. 1993년 1차 핵 위기(NPT 탈퇴 선언) → 1994년 제네바 합의 → 2002년 2차 핵 위기(고농축우라늄 의혹) → 2005년 9·19 공동성명 → 2006년 1차 핵실험 → 이후 2009·13·16·17년 잇따른 핵실험. 평화의 모색과 위기가 교차하는 과정이었다. 북한은 2017년 6차 핵실험과 ICBM 시험 발사를 통해 사실상 핵 보유국이 되었고, 이는 한반도 평화 협상의 가장 큰 난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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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우리 땅이다. 이 명제는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역사적·국제법적 사실이다.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고시 제40호로 독도(다케시마)를 자국 영토에 편입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이전 1,500년에 걸친 우리 영토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다.
독도가 한국 영토로 처음 기록된 것은 신라 지증왕 13년(512)의 우산국 정복이다.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울릉도와 그 부속 도서)을 신라에 편입시켰다는 기록(『삼국사기』)이 그것이다. 이때부터 독도는 우산국의 부속 도서로 우리 역사 안에 들어왔다.
『세종실록 지리지』(1454)는 "우산(독도)·무릉(울릉도) 두 섬은 (강원도) 울진현 정동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두 섬은 서로 멀지 않아 날씨가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한다. 맑은 날에 보인다는 표현은 정확히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는 지리적 조건과 일치한다(약 87.4km, 일본 오키 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1696년의 안용복 사건은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일본 정부 스스로 인정한 결정적 사례이다. 어부 안용복이 두 차례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독도가 조선의 땅임을 항변한 결과, 에도 막부는 1696년 1월 일본인의 울릉도·독도 도해(渡海) 금지령을 내렸다(다케시마 일건). 이후 1877년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 지령도 "다케시마 외 일도(독도)는 본방(일본)과 관계가 없다"고 명확히 했다.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 대한제국 칙령 제41호로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하고, 그 관할 구역에 "죽도·석도(石島, 독도)"를 명시하였다. 이는 일본의 1905년 편입보다 5년 앞선 공식 영유 행위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연합국 총사령부 지령 제677호(SCAPIN 677, 1946.1)는 "일본의 행정 관할에서 제외되는 지역"에 "제주도, 울릉도, 독도(Liancourt Rocks, Take Island)"를 명시하였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한국은 독도를 행정구역(경상북도 울릉군)에 포함시켜 실효 지배해 왔으며, 1953년부터는 독도경비대(현 경찰)가 상주하고 있다.
일본의 다케시마 영유권 주장은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 고시 제40호에 근거한다. 일본은 이를 "무주지(無主地) 선점"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① 이미 우리가 1900년 칙령 제41호로 영유권을 행사한 영토를 ② 러·일 전쟁의 와중에 비공개로 강행한 조치였다. 사실상의 강탈이었던 셈이다.
또한 일본은 국제사법재판소(ICJ) 회부를 1954·1962·2012년 세 차례 제안했지만, 한국은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① 독도는 분쟁 지역이 아닌 우리 영토이며 한국이 실효 지배 중이다. ② ICJ 회부 자체가 "분쟁 지역"이라는 인정이 되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③ 위안부·강제동원 등 일본의 식민 지배 과거사가 미해결인 상태에서 영토 문제만 분리해 다룰 수 없다.
독도 문제는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일본의 식민 지배 청산이 미완성된 결과물이다. 1965년 한·일 협정에서 독도 문제가 "양국이 각자의 입장을 가진다"는 형태로 미봉된 채 봉합되었고, 이는 오늘까지 양국 갈등의 뿌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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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역사 갈등은 단순히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정치 문제이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모두 오늘날 한·중·일 관계를 흔드는 첨예한 쟁점이다.
동북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研究工程)은 2002년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이 5년 계획으로 추진한 동북 변경 지역의 역사 연구 프로젝트이다. 표면상 중국 동북 3성(요녕·길림·흑룡강)의 역사·지리·민족을 연구하는 사업이지만, 그 핵심은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사의 일부(중국 소수민족의 지방 정권)로 편입하려는 것이다.
중국의 주장은 ① "고구려는 중국 영토에서 활동한 중국 소수민족 정권", ② "고구려는 중국에 조공을 바친 지방 정권" 등이다. 그러나 이는 ① 고구려가 한반도와 만주를 아우른 독자적 고대 국가였고, ②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자임했으며, ③ 발해 무왕이 일본에 "고려(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잇는다"고 명시한 사실(『속일본기』 727년 기록)을 무시한 주장이다.
동북공정은 단순한 학문 연구가 아니라 장래의 영토·국경 문제에 대비한 중국의 역사 인식 작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통일 후 한반도와 만주의 경계, 조선족 자치주의 처리 등 미래의 쟁점에 미리 자국에 유리한 역사 해석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2004년 고구려연구재단(2006년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통합)을 설립해 학술적 대응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1982년 일본 교과서 검정 파동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침략"을 "진출"로, "3·1 운동을 폭동"으로 표현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것이다. 2001년에는 우익 단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만든 후소샤(扶桑社)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해 큰 파문이 일었고, 2014년 아베 정부가 검정 기준을 강화한 이후 위안부·강제 동원에 대한 부정적 서술이 더 늘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강제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반복하고 있다. 1993년 고노 담화에서 "강제성"을 인정했지만, 2007년 아베 1차 내각, 2014년 아베 2차 내각이 이를 사실상 뒤집는 발언을 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도 피해자 의견을 배제한 채 체결되어 큰 비판을 받았다(2018년 사실상 무효화).
강제 동원 부정도 진행 중이다. 2018년 한국 대법원이 일본제철·미쓰비시중공업에 대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을 확정했지만,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두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2023년 한국 정부의 "제3자 변제안" 발표 이후에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도쿄의 야스쿠니(靖國) 신사에는 2차 대전 A급 전범 14명을 포함한 약 246만 명의 전사자가 합사되어 있다. 일본 총리·각료의 야스쿠니 참배는 ① 일본 군국주의의 미화, ② 침략 전쟁의 정당화로 받아들여져 한·중·아시아 각국의 강한 반발을 일으켜 왔다. 1985년 나카소네 총리의 공식 참배 이후, 고이즈미(2001~06)·아베(2013)의 참배가 외교 갈등의 도화선이 되었다.
역사 갈등의 해결은 정부 차원만으로는 어렵다. 그래서 2000년대부터 한·중·일 시민·학자들의 공동 역사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2005년 한·중·일 3국의 학자·교사·시민이 함께 만든 『미래를 여는 역사 — 한·중·일이 함께 만든 동아시아 3국의 근현대사』가 그 결실이다. 또한 한·일 역사가 협의회, 한·일 청소년 교류 캠프, 동아시아 평화 학교 등 시민 차원의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유럽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랑스-독일 공동 역사 교과서(2006~2011)는 두 나라가 함께 만든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로, 양국 학생이 같은 교재로 역사를 배운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은 두 나라가 화해를 제도화한 사례이다. 동아시아도 이러한 길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공유된 역사"의 인식이 평화의 토대가 된다는 것을 유럽은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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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정부 회담장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 시민들이 서로의 역사를 이해하고, 청소년들이 국경을 넘어 만나며 만들어진다. 그 작은 만남들이 쌓일 때, 비로소 평화는 견고해진다.
한·일 시민 교류는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꾸준히 이어져 왔다. 한·일 시민단체의 위안부·강제동원 공동 대응, 한·일 청소년 교류 캠프(2003~), 한·일 우정의 해(2005), 한·중·일 청년 회의 등 다양한 차원의 교류가 진행되고 있다. K-팝과 일본 애니메이션을 매개로 한 대중문화의 상호 침투도 양국 청년 세대에게는 자연스러운 환경이 되었다.
한·중 시민 교류는 사드 갈등(2016~)과 코로나19로 한때 위축되었지만, 두 나라는 여전히 서로의 1·2위 교역국이며, 한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약 95만 명(2024)에 이른다. 학술·문화·관광 차원의 교류는 정치적 부침과 별개로 두 사회를 이어 주는 중요한 끈이다.
전국 곳곳에 평화 교육을 실천하는 학교와 단체가 자라고 있다. DMZ 평화 학교, 통일 교육 모범 학교, 평화·인권 동아리 등이 그 사례이다. 청소년들은 분단 체험(파주 임진각, DMZ 견학), 식민지·전쟁 기억의 장소 답사(서대문형무소역사관, 전쟁기념관), 일본·중국 청소년과의 만남을 통해 평화에 대한 자신만의 감각을 키운다.
통일에 대한 한국인의 인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1990년대까지 "통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응답이 80%를 넘었지만, 2020년대 들어서는 50% 안팎으로 떨어졌다. 특히 20대의 통일 지지율은 30% 안팎이다(통일연구원 조사). 이는 통일을 "당위"가 아닌 "선택"으로 보는 인식의 변화이다.
그러나 통일의 형태에 대한 합의는 여전히 분명하다. 점진적·평화적·합의적 통일(설문조사 다수 의견). 흡수 통일이나 무력 통일은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또한 통일의 우선순위가 "민족의 동질성 회복"에서 "전쟁 위협 제거와 평화의 안착"으로 점점 이동하고 있다. "통일보다 평화 우선"이라는 사고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단군 신화에서 오늘까지, 우리는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한국사 전체를 관통하는 가치의 흐름을 함께 되돌아본다.
① 고대(~10C)는 한반도에 다양한 정치체가 등장해 통일된 영토 국가를 만든 시기다. 고조선의 8조법은 생명·신체·재산의 가치를, 삼국과 통일신라·발해는 중앙집권적 정치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② 중세(10~14C)의 고려는 다원적 사회 통합을 시도했다. 호족·문벌·무신·신진사대부로 이어진 지배층의 변동 속에서, 불교와 유교가 공존했고 팔만대장경·금속활자가 만들어졌다.
③ 근세(14~19C)의 조선은 유교적 이상 사회의 실험이었다. 성리학적 명분론과 신분제의 한계 속에서도, 훈민정음·실학·동학·서학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갔다.
④ 근대(19C 후반~1945)는 외세의 침략에 맞서 독립과 자주를 추구한 시기다. 동학농민운동, 의병운동, 3·1 운동, 임시정부, 무장 독립 운동—식민지의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냈다.
⑤ 현대(1945~)는 분단의 비극과 산업화·민주화의 동시 달성, 그리고 외환위기·한류·평화의 모색에 이르는 격동의 80년이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제1조가 종이 위 문구에서 실제 작동하는 현실이 된 시기다.
다섯 시기를 관통하는 한국인의 가치를 한 줄로 정리한다면, 그것은 자유·평등·민주·평화일 것이다.
고조선의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8조법은 생명의 평등을 말한다. 동학의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는 인간의 존엄을 선포한 것이다. 3·1 운동의 "조선은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이라는 선언은 민족의 자유를 향한 외침이었다.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임시헌장(1919.4.11)은 왕정에서 민주로의 결단이었다. 그리고 4·19, 5·18, 6월 항쟁, 촛불집회의 시민들은 민주주의의 살아 있는 실천이었다.
이 모든 발자취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모인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가?" 단군 신화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弘益人間)"는 그 가장 오래된 답이었고, 헌법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은 그 가장 새로운 답이다. 답은 시대마다 다르게 쓰였지만, 질문은 늘 같았다.
안용복(1654~?)은 동래 출신의 어부로, 두 차례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항변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활동은 단순한 어부의 모험을 훨씬 뛰어넘는 외교적 성과를 남겼다.
1693년 1차 도일 — 울릉도 앞바다에서 일본 어부에 의해 납치되어 호키주(돗토리현)로 끌려감. 호키주 태수에게 "울릉도·우산도(독도)는 조선 땅"이라 항변. 에도 막부로 송환되어 같은 주장을 반복.
1696년 2차 도일 —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호키주 태수에게 "조선의 영토 침범"에 대해 항의.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관"(가짜 직책)이라 칭하며 조정의 사신처럼 행세함.
1696년 1월 — 에도 막부, 일본인의 울릉도·독도 도해 금지령 발포(다케시마 일건).
안용복이 귀국한 후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조정의 논의가 있었지만(가짜 직책을 칭한 죄), 영의정 남구만 등의 변호로 사형은 면하고 유배에 처해졌다. 그러나 그가 일으킨 다케시마 일건의 결과로 약 200년간 일본 어선의 울릉도·독도 진출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일본 정부 스스로 두 섬이 조선 땅임을 공식 인정한 결정적 외교적 성과이다.
이는 1877년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 지령("다케시마 외 일도는 일본과 관계없다")으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한 어부가 남긴 외교적 유산이 200년 후의 일본 정부 공식 문서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오늘날 독도 영유권 주장의 가장 강력한 사료 중 하나이다.
단군 신화의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부터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까지,
한국인은 자유·평등·민주·평화의 가치를 추구해 왔습니다.
삼국의 통일과 분단, 고려와 조선의 흥망, 식민지의 어둠과 광복의 환희,
전쟁의 폐허와 산업화·민주화의 성취,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마주한 평화의 과제—
이 모든 길은 우리에게 "어떤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를 묻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 길을 이어가는 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