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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한사2-02-01

냉전 체제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환희는 짧고 분단은 길었다." — 광복은 왜 곧바로 통일 국가로 이어지지 못했는가?

영역 1945 ~ 1949 광복·신탁통치·정부수립
VISUAL JOURNEY · 광복과 분단

사진으로 미리 보는 1945~1948

8·15 광복
8·15 광복 · 35년 식민지 끝
38선
38선 · 군사 편의의 경계선
반탁 운동
반탁 시위 · 좌우의 분기
김구 남북협상
김구 평양행 · 마지막 통일 시도
5·10 총선거
5·10 총선거 · 최초의 보통선거
정부 수립 선포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 · 1948.8.15

들어가며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은 곧 새로운 시련으로 이어졌다. 38선을 경계로 한 미·소의 분할 점령,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갈등, 단독 정부 수립과 통일 정부 운동의 충돌 — 한반도는 냉전이 가장 먼저, 가장 깊게 새겨진 무대가 되었다.

이 단원에서는 광복부터 정부 수립까지 3년의 격동을 살펴본다. 단순히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국제 정세(미·소 냉전),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그리고 통일 정부를 향한 마지막 시도들을 함께 보아야 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분단은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38선은 군사적 편의를 위한 임시 경계선이었고, 한반도 사람들 대부분은 통일된 임시정부 수립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외부의 냉전 질서와 내부의 좌·우 대립이 맞물려, 결국 두 개의 분단국가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 단원의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 그 길을 다르게 갈 수 있었는가?

1
광복·분할
8·15 → 38선·미소 분할 점령
2
신탁 논쟁
모스크바 협정 → 좌우 분기
3
통합 시도
좌우합작·남북협상
4
정부 수립
5·10 → 제헌헌법 → 8·15

광복에서 정부 수립까지의 4단계 — 이 단원의 핵심 흐름

▶ 광복에서 정부 수립까지 — 5단계
1945.8
8·15 광복
1945.12
모스크바 3상
1947
미소공위 결렬
1948.5
5·10 총선거
1948.8
정부 수립
단계를 클릭해 보세요.
8·15 광복 환호
1945년 8월 15일, 서울의 거리.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듣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다. 35년간 숨겨 두었던 깃발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 Public Domain

광복 정국을 만든 사람들

정부 수립 3년의 격동기에는 각기 다른 노선과 비전을 가진 정치 지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선택을 통해 그 시대를 이해해 보자.

PEOPLE · 광복 정국의 6인 — 카드를 눌러 상세 보기
여운형
1886~1947
건국준비위
김구
1876~1949
남북협상
이승만
1875~1965
단정 노선
김규식
1881~1950
좌우합작
박헌영
1900~1956
조선공산당
조봉암
1899~1959
농지개혁

8·15 광복과 국제 정세

광복은 일제의 패망과 우리 민족의 끈질긴 독립 운동이 만난 결과였다. 그러나 광복의 순간, 한반도는 이미 강대국의 전후 처리 구상 속에 들어가 있었다.

광복은 어떻게 왔는가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두 가지 흐름이 만난 결과였다. 첫째,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이다.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와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8월 8일)로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었다. 둘째, 우리 민족의 꾸준한 독립 노력이다. 3·1 운동(1919),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무장 투쟁, 국내외 비밀 결사의 활동은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을 약속하게 만든 배경이 되었다.

국제회담과 한반도의 운명

한국의 독립은 2차 대전 중 연합국 회담에서 처음 공식화되었다. 카이로 회담(1943.11)에서 미국·영국·중국 정상은 "한국인이 노예 상태에 있음에 유의해,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할 것을 결의한다"고 선언하였다.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으로 보장한 최초의 약속이었다.

사료 · 카이로 선언
"위 3대 동맹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결의를 표명한다."
— 카이로 선언, 1943년 11월 27일
읽기 포인트 — '적절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모호한 표현이 후에 신탁통치 구상의 씨앗이 되었다. 한국인은 즉시 독립을, 강대국은 일정한 후견 기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 인식의 간극이 광복 후 갈등의 한 원인이었다.

얄타 회담(1945.2)에서는 소련의 대일 참전이 합의되었고, 한반도의 신탁통치 가능성이 비공식적으로 논의되었다. 포츠담 회담(1945.7)에서 카이로 선언이 재확인되며 한국의 독립이 거듭 천명되었다. 그러나 한반도를 어떻게 독립시킬지에 대한 구체적 계획은 마련되지 않았고, 일본의 갑작스러운 항복은 이 공백을 더욱 키웠다.

38선의 등장

1945년 8월 10~11일 새벽, 미 국무성 회의실에서 두 명의 젊은 장교(딘 러스크, 찰스 본스틸)가 30분 만에 그은 선이 38선이었다. 소련군이 이미 만주에서 한반도로 진군 중이었고,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다. 일본군 무장 해제를 분담하기 위한 군사적 편의 상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나 이 임시 경계선이 영구 분단선이 되리라고 당시 누구도 분명히 예측하지 못하였다.

38선 표지석
38선 표지판(1945년 9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군과 소련군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였다. 1945년 9월 9일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 조인식이 거행되었고,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출처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 Public Domain

국내 정치 세력의 움직임

광복 직후 한국 내에서도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움직임이 분주하게 일어났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8월 15일 결성되어 치안 유지와 행정 인수에 나섰고, 전국에 145개 지부를 두었다. 9월 6일에는 미군 진주를 앞두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김구·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11월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였고, 이승만은 10월에 미국에서 돌아왔다. 송진우·김성수의 한국민주당,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좌우 각 정파가 결성되며, 한반도 정치는 다극 구도를 띠게 되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와 신탁통치 논쟁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외상이 한반도의 미래를 결정하였다. 그 결정 — 임시정부 수립과 5년 신탁통치 — 은 한반도를 좌·우로 갈라놓는 결정적 사건이 되었다.

모스크바 결정의 내용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1945.12)의 한반도 결정 사항은 네 가지였다. ①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기 위해 임시 민주 정부를 수립한다. ②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해 임시정부 수립을 협의한다. ③ 미·영·중·소 4국이 최대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 ④ 2주 내에 미·소 사령관 회담을 소집한다.

이 결정의 핵심은 사실 ①②번 —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신탁통치는 그 임시정부 수립 후의 보조 장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③번 신탁통치만 부각되어 보도되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사료 · 모스크바 협정 한국 조항
"한국을 독립국가로 재건설하며 그 나라를 민주주의적 원칙하에 발전시키는 조건을 조성하고 ⋯ 조선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다. ⋯ 조선임시정부 및 조선민주주의단체의 참여하에 ⋯ 최고 5년 기간의 4국 신탁통치의 협약을 작성하기 위하여 ⋯"
—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서」, 1945년 12월 28일
읽기 포인트 — 협정은 "임시정부 수립이 먼저, 신탁통치는 그 임시정부와 협의하여 최대 5년"이라는 순서를 분명히 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의 첫 보도는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왜곡된 헤드라인으로 시작되었다. 이 오보가 신탁통치 논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반탁과 찬탁 — 입장의 변화

처음 모스크바 결정 소식이 전해지자 좌우 가릴 것 없이 반탁(信託統治 反對) 입장을 표명하였다. 김구의 임시정부 계열, 이승만, 김성수의 한민당이 즉시 반탁 운동을 시작했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도 처음에는 반탁 입장이었다.

그러나 협정의 본문이 알려지고, 임시정부 수립이 주된 내용임이 확인되자 좌익은 입장을 바꾸어 '모스크바 결정 총체적 지지'(찬탁) 쪽으로 돌아섰다. 1946년 1월 초의 일이다. 이는 좌·우의 결정적 분기점이 되었다. 같은 협정을 두고 '신탁통치 반대'와 '협정 전체 지지'로 갈라진 것이다.

반탁 운동은 임시정부 계열을 중심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1945년 12월 31일 서울에서 대규모 반탁 시위가 열렸고, "신탁통치 결사 반대"가 우파의 슬로건이 되었다. 반탁은 단순한 외교 사안이 아니라 민족 자주성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1945.12.30 신탁통치 반대 운동
신탁통치 반대 운동(1945년 12월 30일, 서울).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결정이 알려지자 서울 거리에 "신탁통치 결사 반대" 펼침막이 가득했다. 광복의 환호가 채 가시기 전, 한반도는 또 다른 갈등의 한복판으로 들어섰다.
출처 · 19451230 신탁통치 반대 운동 · Wikimedia Commons (PD)
DEEP DIVE · 학계의 쟁점
동아일보의 '신탁통치 오보'는 우연이었나?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 1면 헤드라인은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었다. 그러나 실제 협정은 정반대에 가까웠다(신탁통치 안을 처음 제안한 것은 미국이었고, 소련은 단축안을 제시했다). 이 오보가 어떻게 나왔는지는 오랜 논쟁거리다.

단순 오보설: 합동통신(UP·INS 등)의 부정확한 외신 번역에서 비롯되었다는 견해. ② 의도적 왜곡설: 우익 진영이 좌익의 입지를 약화시키려고 의도적으로 왜곡 보도했다는 견해(2016년 동아일보 자체 검증). ③ 혼합설: 초기 오보가 빠르게 정정되지 않았고, 오히려 정치적으로 활용되었다는 견해.

중요한 점은 오보의 진실 여부를 떠나, 이 보도가 한반도 정치에 미친 영향이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좌익에는 '친소 매국'의 낙인이, 우익에는 '민족 자주'의 후광이 씌워졌다. 이후 좌익이 입장을 바꾸어 모스크바 결정을 지지했을 때, 이미 여론은 우익 편에 서 있었다.

INTERACTIVE · 격동의 3년

광복에서 정부 수립까지 1945~1948

사건 점을 눌러 격동기 한반도의 흐름을 따라가 보세요

8·15 광복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으로 한반도는 35년간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같은 날 미군과 소련군의 분할 점령도 시작되었다. 환호는 곧 새로운 시련과 마주하게 된다.

미소공동위원회와 좌우 합작 운동

신탁통치 논쟁의 와중에서도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미소공동위원회가 가동되었다. 그러나 미·소 냉전이 격화되며 협상은 결렬되고, 한반도는 단독 정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1946.3~5, 서울)는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협의에 참여할 정당·사회단체의 자격을 두고 미·소가 충돌하였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정에 반대한(반탁한) 정당을 협의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 보장 차원에서 모든 정당의 참여를 요구하였다. 결국 결렬되었다.

1년 2개월 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1947.5~7)가 다시 열렸지만, 이번에는 협의 대상 단체 명단 자체가 합의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미국은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1947.9)하기로 결정하였다.

좌우 합작 운동 — 마지막 통일 정부의 시도

미·소의 분할 점령과 좌·우의 분열이 깊어지자, 중도파를 중심으로 통일 정부를 향한 마지막 시도가 일어났다. 1946년 7월, 여운형(중도좌파)과 김규식(중도우파)을 공동 의장으로 한 좌우합작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미군정의 후원도 있었다.

좌우합작위원회는 좌우합작 7원칙(1946.10)을 발표하였다. 핵심은 ① 모스크바 협정에 따른 좌우 합작으로 임시정부 수립, ② 미소공위 속개 운동, ③ 토지의 몰수·유조건 몰수·체감 매상으로 농민에게 무상 분여, ④ 친일파·민족 반역자 처리, ⑤ 정치범 석방, ⑥ 입법 기관 설치 등이었다. 좌·우의 주장을 절충한 합리적 방안이었다.

사료 · 좌우합작 7원칙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삼상회의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할 것. ⋯ 3. 토지 개혁은 몰수·유조건 몰수·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 4. 친일파 및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
— 「좌우합작 7원칙」, 1946년 10월 7일
읽기 포인트 — 7원칙은 좌(토지 무상 분배)와 우(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조심스럽게 절충한 시도였다. 그러나 좌·우 양 극단은 모두 이를 비판하였다. 좌익(박헌영)은 "토지의 무상 몰수가 아니다"라며, 우익(한민당)은 "토지를 빼앗는 사회주의"라며 반대했다. 중도의 어려움이 이미 여기서 드러났다.

좌우합작 운동은 1947년 7월 여운형의 암살로 결정적 타격을 입었다. 미군정의 지원이 약화되고, 미국이 한국 문제를 UN으로 이관함에 따라 좌우합작위원회는 12월에 해산되었다. 통일 정부를 향한 마지막 큰 시도가 좌절된 것이다.

UN의 결정과 5·10 총선거

UN 총회는 1947년 11월 한반도 총선거를 통한 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입북을 거부하자, 1948년 2월 UN 소총회는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하였다. 사실상 남한만의 단독 선거 결정이었다.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5·10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21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보통선거권이 주어진 한국 최초의 민주적 보통선거였다. 198명의 제헌국회 의원이 선출되었다(제주 4·3 사건으로 제주도 2개 선거구는 실시 불가). 무소속 85명, 대한독립촉성국민회 55명, 한민당 29명 등이 당선되었다.

5·10 총선거
5·10 총선거(1948). 한국 역사상 최초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였다. 95.5%의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지만, 김구·김규식 등 임시정부 계열과 좌익은 불참하였다.
출처 · 국가기록원 · Public Domain
남북협상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향하는 김구(1948.4).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에는 협력할 수 없다"는 결의로 김구·김규식이 평양에 갔으나, 분단을 막지는 못하였다.
출처 · 백범기념관 · Public Domain
INTERACTIVE · 논쟁의 구조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우 입장의 변화

시기를 눌러 좌익과 우익의 입장이 어떻게 갈라졌는지 확인해 보세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제헌헌법

5·10 총선거로 선출된 제헌국회는 헌법을 만들고, 정부를 수립하였다. 1948년 8월 15일, 광복 3년 만에 대한민국이 공식 출범하였다.

제헌국회와 제헌헌법

1948년 5월 31일 개원한 제헌국회는 의장에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7월 17일, 제헌헌법이 공포되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시작되는 헌법은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 민주공화국임을 분명히 했다.

사료 · 제헌헌법 전문 (1948)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
— 「대한민국 헌법」 전문, 1948년 7월 17일
읽기 포인트 —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구절은 임시정부(1919) → 대한민국(1948)의 연속성을 헌법에 못박은 것이다. 1919년 임시정부 헌법의 "민주공화제"가 1948년 제헌헌법의 "민주공화국"으로 이어졌다. 두 헌법을 함께 읽어보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100년의 역사 속에 어떻게 자리잡았는지 알 수 있다.

제헌헌법의 주요 내용

제헌헌법(전문 + 본문 10장 103조)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졌다.

구분내용의미
국가 정체민주공화국(제1조)임시정부 헌법의 계승, 군주제 단절
주권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제2조)국민주권 원리 천명
권력 구조대통령 중심제(국회 간선)의원내각제 → 대통령제로 막판 수정
대통령 임기4년, 1차 중임 가능장기 집권 방지 의도
국회단원제, 임기 4년제헌국회는 2년 한시(과도 성격)
경제 조항중요 자원의 국유, 농지의 농민 분배(제86조)사회주의적 요소, 농지개혁 헌법적 근거
기본권평등권·자유권·참정권·청구권·사회권 포괄근대 입헌주의 + 사회적 권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제헌국회는 7월 20일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을 선출하였다. 1948년 8월 15일, 광복 3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 거행되었다. UN 총회는 12월 12일, "대한민국 정부는 한반도 내에서 유일하게 합법적으로 수립된 정부"라고 결의하였다(48개국 찬성).

1948.8.15 중앙청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1948.8.15, 중앙청). "광복 3주년" 현수막이 보인다.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 연설을 했고, 미군정 사령관 하지가 미군정의 종료를 선언하였다.
출처 · 19480815 중앙청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 Wikimedia Commons (PD)

북한의 정권 수립

북한에서도 한 달 뒤인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 결성, 8월 북조선노동당 창당, 1948년 2월 조선인민군 창설을 거쳐,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선거 후 9월 9일 정권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 한반도에는 이제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 분단이 사실상 고착되었다.

DEEP DIVE · 평가의 쟁점
남북 정부 수립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대한 평가는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 논쟁의 핵심이다.

긍정적 평가: 한반도에서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탄생했다. 보통선거에 의한 의회 구성, 민주공화국의 헌법, 국제적 승인(UN) — 이 모두는 한국 근대 정치사의 결정적 진전이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은 정통성 있는 정부였다.

비판적 평가: 결과적으로 분단을 고착시킨 정부가 되었다. 김구·김규식 등 통일 지향 세력이 배제되었고, 친일파 청산이 좌절되었다. 좌·우를 아우르는 민족 통합에 실패했다.

균형적 시각: 당시 국제 정세(미·소 냉전)와 국내 정치의 양극화 속에서 '가능했던 최선'이었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분단의 책임은 어느 한 세력만의 것이 아니라, 국제 냉전 질서와 국내 정치 모두의 산물이다. 중요한 것은 그 평가를 통해 오늘 우리가 어떤 통일·민주국가를 만들어 갈 것인가를 묻는 일이다.

정부 수립 후의 과제 — 반민특위와 농지개혁

새 정부 앞에는 두 가지 시급한 과제가 놓여 있었다. 첫째, 일제 잔재의 청산. 둘째, 농민이 80%인 사회에서의 토지 문제 해결.

반민특위 — 친일파 청산의 좌절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10월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였다. 1949년 1월부터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주)·최린·최남선·이광수 등 친일 인사를 체포·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노골적으로 비협조적이었다. 이승만은 친일 경찰과 관료를 국가 통치에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 습격 사건'이 발생하였다.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해 특위 소속 경찰관 35명을 무장 해제하고 연행한 것이다. 같은 시기 발생한 국회 프락치 사건(반민특위 소속 의원들에 대한 간첩 혐의 조작)과 맞물려, 반민특위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1949년 8월 반민법이 개정되어 공소시효가 단축되었고, 1949년 10월 반민특위는 해체되었다. 결국 총 682건 조사, 38건 기소, 12건 유죄 판결에 그쳤고 실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7명, 그나마도 모두 1950년 봄에 풀려났다.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한국 현대사의 큰 한계로 남았다.

농지개혁 — 부분적 성공

1949년 6월 제정된 농지개혁법(1950년 3월 개정·시행)은 유상매수·유상분배 원칙을 채택하였다. 정부가 지주의 토지를 매수해 농민에게 분배하고, 농민은 5년간 평년 수확량의 1.5배(연 30%)를 지가로 갚는 방식이었다.

북한의 무상몰수·무상분배(1946.3)에 비하면 보수적이었지만, 농지개혁은 조선 시대 이래의 지주제를 사실상 해체하는 큰 변화였다. 광복 직후 약 65%였던 소작지 비율이 1951년에는 8%로 급감했다. 농민이 자기 땅을 갖게 됨으로써 6·25 전쟁 당시 농민들이 북한 인민군에 호응하지 않게 된 사회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다만 한계도 분명했다. 지가 상환 부담이 무거워 일부 농민은 다시 땅을 팔게 되었고, 농가의 영세성은 해결되지 않았다. 또 토지개혁이 1950년 3월에야 본격 시행되어, 6·25 전쟁 직전에 가까스로 진행된 한계도 있다.

구분북한 토지개혁(1946)남한 농지개혁(1949~50)
방식무상몰수·무상분배유상매수·유상분배
대상5정보 이상 / 자작 5정보 이상 / 친일파 등3정보 초과 농지
속도한 달 만에 마무리4년에 걸쳐 진행
지주 보상없음(추방)지가증권 지급
농민 부담없음5년간 연 30% 상환
성격혁명적·일거에점진적·보수적

사료로 읽는 정부 수립

광복부터 정부 수립까지의 3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농밀한 시기 가운데 하나이다. 사료를 통해 그 격동을 직접 확인해 보자.

CHECK · 사료 해석 ①
다음 사료가 발표된 직접적 배경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우리는 통일된 조국을 위하여 끝까지 노력할 것이다."
— 김구,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2)
해설 — 1948년 2월 26일 UN 소총회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의하면서 사실상 남한 단독 선거가 결정되었다. 이에 김구는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하고,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여했다. 단독 정부 수립을 막으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DEBATE · 두 길이 갈라지다
단독 정부 수립 vs 남북 협상 — 어느 길이 옳았나?
단독 정부 수립론 (이승만·한민당)
  • 북한이 이미 사실상 정권을 수립 — "우리만이라도"(정읍 발언)
  • UN의 결정과 국제 승인을 활용한 현실주의 노선
  •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빠른 수립
  • 공산화 위협으로부터의 방어
VS
남북 협상론 (김구·김규식)
  •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 분단을 막아야 한다
  • 통일 임시정부가 정통성의 근원
  • 외세에 의한 분단 고착화 거부
  • 좌우합작·민족 자주의 마지막 시도
📖 더 깊이 —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전문 일부

김구가 1948년 2월 10일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三千萬同胞에게 泣告함)」은 단독 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마지막 호소문이었다.

"마음속의 38도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도선도 철폐될 수 있다. ⋯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리라."
— 김구,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2.10)

이 호소문은 좌우와 남북을 가리지 않고 분단을 막아야 한다는 절절한 외침이었다. 김구는 4월 19일 평양으로 향했고, 김규식도 합류했다. 그러나 남북협상은 분단을 막지 못했고,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안두희에게 암살당했다.

MINI GAME · 시간 여행
광복~정부 수립의 6대 사건 — 시간 순으로 배열
아래 6개의 사건을 일어난 순서대로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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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 GAME · 인물·업적 매칭
광복 정국의 인물과 업적을 짝지어 보세요
왼쪽에서 인물(혹은 사건)을 한 명 고른 뒤, 오른쪽에서 짝을 클릭하세요.
인물 / 사건
여운형
김구
이승만
김규식
농지개혁(1949)
업적 / 핵심
좌우합작 7원칙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유상매수·유상분배, 농민 자작농화
남북협상,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정읍 발언, 초대 대통령
맞힌 짝 · 0 / 5
CHECK · 사료 해석 ②
제헌헌법의 다음 조항에서 추론할 수 있는 사실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제86조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써 정한다."
— 「대한민국 헌법」 제86조, 1948.7.17
해설 — 제헌헌법 제86조는 농지의 농민 분배를 헌법으로 천명한 조항이다. 광복 당시 농민이 전 국민의 80%를 차지하고 소작 비율이 65%에 이른 상황에서, 토지 문제는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시대적 과제였다. 좌·우 가릴 것 없이 토지 개혁의 필요성에는 동의했고, 다만 방식(무상 vs 유상)에서 갈렸다. 이 조항이 1949년 농지개혁법(유상매수·유상분배)의 헌법적 근거가 되었다.

정리와 탐구

광복~정부 수립 한눈에 보기

시기주요 사건의미
1945.8광복, 38선 분할, 건국준비위원회광복과 분단의 동시 시작
1945.12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 신탁통치 보도좌·우 결정적 분기
1946.3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임시정부 협의 시작·결렬
1946.7~10좌우합작위·7원칙중도 통합 시도
1947.5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최종 결렬
1947.11UN 한반도 총선거 결의한국 문제 국제 무대로
1948.2UN 소총회 단독선거 결정분단 사실상 결정
1948.4남북협상(김구·김규식)마지막 통일 정부 시도
1948.5.105·10 총선거(제헌국회)최초의 보통선거
1948.7.17제헌헌법 공포민주공화국 기초
1948.8.15대한민국 정부 수립대한민국 출범
1948.9.9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분단 고착화
1949.6반민특위 습격, 농지개혁법친일 청산 좌절, 토지 개혁
EXPLORE · 탐구해 봅시다

정부 수립으로 던지는 질문

建國 마스터
"광복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분단과 통일의 갈림길을 모두 짚었습니다."
다음 단원으로 떠날 준비가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