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광복 후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 광복 이전, 이미 준비된 미래의 청사진들.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었다. 일본의 침략 전쟁이 확대된 1937년 이후, 중국·만주·미주·국내의 독립 운동가들은 광복 이후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를 두고 치열하게 고민했다. 이 단원에서는 그 통합과 준비의 과정을 살펴본다.
이 시기 독립 운동의 핵심 흐름은 ① 좌우 통합의 시도, ② 무장 투쟁의 강화(한국광복군·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③ 건국강령의 마련(임시정부의 삼균주의, 조선독립동맹과 조선건국동맹의 강령) 이렇게 세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비록 광복 이전에 통합이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분단된 한반도에서 통일 정부 수립의 노력으로 이어진 사상적·조직적 자산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다.
또한 카이로 회담(1943)·얄타 회담(1945)·포츠담 회담(1945)을 거치며 국제 사회의 한국 독립 약속이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그 독립이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질지(독립의 시기·신탁통치 여부·국가 형태)는 여전히 미정이었고, 이는 광복 후 한반도의 운명을 가르는 결정적 변수가 된다.
▲ 독립 국가 건설의 네 단계 — 광복은 이미 1919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은 동아시아의 판도를 뒤흔들었다. 일본의 침략이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자, 중국 정부(국민당·공산당)와 한국 독립 운동가들의 연대가 새로운 차원으로 진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영국이 일본과 전쟁에 들어갔고, 한국 독립의 가능성이 국제 정세 속에서 처음으로 열렸다.
1930년대 중반 만주의 무장 투쟁이 한계를 맞자, 중국 관내(內地)로 활동 무대가 옮겨졌다. 한국 독립 운동은 크게 두 갈래의 통일 전선으로 재편되었다.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이 중국 관내에서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아래 결성된 이 부대는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정규 군사 조직이었다. 약 300여 명으로 출발해, 중국군과 연합해 일본군과 싸웠다. 정보 수집·일본군 포로 심문·후방 교란 등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1940년대 초 조선의용대 내부에 노선 갈등이 일어났다. ① 본대의 주력(약 80%)은 김두봉·무정 등이 이끌고 중국 공산당 지역(화북)으로 이동해 조선의용군(1942)으로 재편되었다. ② 김원봉을 비롯한 일부 지도부와 잔여 병력은 충칭의 임시정부로 합류(1942)해 한국광복군 제1지대가 되었다.
1940년 5월 충칭에서 김구의 한국국민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이 통합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중앙집행위원장 김구). 같은 해 임시정부는 주석 단일 지도 체제로 개헌해 김구를 주석으로 한 단일 지도력을 확립했다.
1941년 김원봉 등 좌파의 임시정부 합류와 1944년 개헌으로 임시정부는 좌우 통합 정부로 발전했다. 김구(주석)·김규식(부주석)이 우파를, 김원봉(군무부장)이 좌파를 대표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화북의 조선독립동맹(김두봉)·국내 조선건국동맹(여운형) 등 좌파 세력 전체를 통합하지는 못한 한계가 있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17년 동안의 망명 활동에 마침내 독자 군대가 더해진 것이다. 광복군은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을 도왔고, OSS와의 합작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식이 열렸다. 총사령관 지청천(이청천), 참모장 이범석. 초기 병력은 약 300여 명. 1942년 조선의용대 일부가 합류하고, 1944년 김원봉이 부사령관에 취임하면서 좌우 통합 군대로 성장했다(최대 시기 약 700~1,000명 추산).
1945년 8월, 광복군은 미국 OSS와의 합작 작전을 막바지 준비 중이었다. 시안과 푸양에서 훈련받던 국내정진군 50여 명은 8월 20일경 국내에 잠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8월 6일과 9일의 원자폭탄 투하,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작전은 실현되지 못했다.
김구는 회고록 『백범일지』에서 이 일을 두고 "광복군이 국내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우고 우리 손으로 일본의 항복을 받았더라면 한반도의 운명이 크게 달랐을 것"이라 한탄했다. 만약 광복군의 국내 진공이 이루어졌다면, ① 임시정부가 광복 후 한반도의 통치 주체로 인정받았을 가능성, ② 미·소의 38도선 분할 점령이 다른 방식으로 결정되었을 가능성, ③ 한국 독립이 '연합국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닌 '한국인이 쟁취한 것'으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는 역사의 가정이지만, 8·15 광복의 의미를 깊이 묻는 데 중요한 질문이다.
각 단체를 눌러 1937~1945년 좌우 통합 시도의 과정을 살펴보세요
세 단체의 건국강령을 비교해 보세요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만이 광복 직전의 독립 운동이 아니었다. 중국 화북의 사회주의 계열(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과 국내의 좌우 통합 비밀 결사(조선건국동맹)도 광복 후의 새 나라를 준비하고 있었다. 광복 후 한반도의 분단과 좌우 갈등을 이해하려면, 이 세 흐름을 함께 알아야 한다.
1942년 7월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 옌안(延安)에서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었다. 위원장 김두봉(전 조선어학회), 부위원장 최창익·한빈. 군사 조직으로 조선의용군(사령관 무정)이 활동하며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함께 일본군과 싸웠다. 이들의 정치 노선은 사회주의 계열이었지만, 광복 후 통일 정부 수립의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었다.
조선독립동맹의 강령은 ① 일본 제국주의의 타도, ②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공화국 수립, ③ 토지의 무상 몰수·무상 분배, ④ 8시간 노동제, ⑤ 의무 교육 등이었다. 임시정부의 삼균주의와 비슷하면서도 토지 정책 등에서 더 급진적이었다. 광복 후 김두봉·무정 등은 북한으로 입북해 북한 정권 형성에 참여했지만, 1950년대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다.
국내에서도 광복 후의 준비가 이루어졌다. 1944년 8월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조선건국동맹이 그 핵심이다. 비밀 결사 형태로 결성된 이 단체는 좌우의 인사들을 포괄했고(여운형·조동호·이만규·이여성 등), 약 7만 명의 회원이 가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건국동맹의 강령은 ① 일본 제국주의의 축출, ② 조선의 자유와 독립 회복, ③ 좌우 통합의 민주주의 국가 수립이었다. 일제 패망에 대비한 정세 분석과 함께, 농민·노동·청년 등 각 부문 조직화를 추진했다. 또한 조선독립동맹·임시정부와의 연계도 시도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 조선건국동맹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로 발전해 미군 진주 전까지 국내 행정·치안을 사실상 담당했다. 9월 6일에는 좌·우 인사들이 모여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미 군정이 인정하지 않아 좌절되었다(이 부분은 다음 단원에서 자세히 다룬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국 지도자들의 일련의 회담에서 한국 독립이 명문화되었다.
| 회담 | 시기·장소 | 참가 | 한국 관련 내용 |
|---|---|---|---|
| 카이로 회담 | 1943.11 · 이집트 카이로 | 미(루스벨트)·영(처칠)·중(장제스) |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한국을 자유 독립국으로 한다" — 한국 독립을 국제 사회가 공식 약속한 최초의 문서 |
| 얄타 회담 | 1945.2 · 소련 얄타 | 미(루스벨트)·영(처칠)·소(스탈린) |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 논의(약 20~30년), 소련의 대일전 참전 합의 |
| 포츠담 회담 | 1945.7 · 독일 포츠담 | 미(트루먼)·영(처칠/애틀리)·소(스탈린)·중(장제스) | 카이로 선언의 한국 독립 약속을 재확인. 일본의 무조건 항복 요구 |
카이로 선언의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표현은, 한국의 즉각적 독립이 아닌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이는 임시정부의 즉시 독립 요구와는 큰 차이가 있었고, 광복 후 한반도에서 신탁통치 논쟁이 격화되는 단초가 되었다.
광복 직전까지 한국 독립운동 진영은 여러 노선으로 나뉘어 있었다. ① 임시정부(충칭) — 우파 한국독립당 중심, 좌파 김원봉도 합류. ② 조선독립동맹(옌안) — 사회주의 계열, 중국 공산당과 연계. ③ 조선건국동맹(국내) — 여운형 중심, 좌우 통합. 각 단체는 1944~45년에 상호 연계를 시도했지만, 광복 전에 단일한 정부로 통합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① 지리적 분산(충칭·옌안·국내), ② 국제 정세의 불확실성(연합국이 어느 세력을 인정할지 미지수), ③ 이념적 차이(자유민주주의 vs 사회주의), ④ 지도자 간의 권력 경쟁(김구·이승만·여운형·김두봉)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분열은 광복 직후 좌우 합작 운동의 좌절(1946~47)과 남북 분단(1948)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통합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① 1948년 4월 김구·김규식의 남북협상, ②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③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통일 노력의 사상적 출발점이 이 시기에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 단체 | 시기·위치 | 중심 인물 | 군사 조직 | 건국 강령의 핵심 |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1919~45 · 충칭(1940~) | 김구·김규식·김원봉 | 한국광복군(1940) | 삼균주의 — 정치·경제·교육 균등 / 민주공화국 |
| 조선독립동맹 | 1942~45 · 옌안 | 김두봉·무정 | 조선의용군(1942) | 토지 무상 분배 · 사회주의 노선의 민주공화국 |
| 조선건국동맹 | 1944~45 · 국내(서울) | 여운형·조동호 | (군사 조직 없음, 청년 동원) | 좌우 통합의 민주주의 국가 |
1943년 11월 27일 카이로 회담 선언문은 한국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The aforesaid three great powers, mindful of the enslavement of the people of Korea, are determined that in due course Korea shall become free and independent."
(앞서 말한 세 강대국은 한국 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롭게 독립국이 될 것임을 결의한다.)
— 카이로 선언(1943.11.27.)
이 "적당한 시기에(in due course)"라는 표현은 한국의 즉각적 독립이 아닌 일정 기간의 신탁통치를 거친다는 의미였다. 임시정부와 한국 독립 운동가들은 이 표현에 강력히 반발했다. 김구는 "왜 우리에게 적당한 시기인가? 우리는 35년이나 준비해 왔다"고 분노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미·영·소) 외상 회의에서 한국의 5년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국내에서는 반탁(反託)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처음에는 좌우 모두 반탁이었으나, 1946년 1월 좌익이 신탁통치 지지로 입장을 바꾸면서 좌·우 격렬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이는 결국 1948년 남북 분단의 한 원인이 되었다. 카이로의 한 문구가 한반도의 운명을 가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