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무엇을, 얼마나 거두었는가" — 세금의 역사는 백성의 역사이다.
국가는 백성에게서 무엇을 거두었는가. 세금의 역사는 곧 백성의 삶의 역사이다. 세금이 정의로우면 백성이 평안하고, 세금이 불공정하면 백성이 들고일어났다. 농민 봉기와 왕조 교체의 배경에는 늘 수취 체제의 모순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단원에서는 고대·고려·조선의 수취 체제 변화를 농업 중심의 경제생활과 연결해 살펴본다. 조용조(租庸調)의 원형에서 출발해, 고려의 전시과, 조선 전기의 과전법, 조선 후기의 영정법·대동법·균역법에 이르는 변천을 따라가며, 각 시기 농민의 어깨 위에 얹힌 짐이 어떻게 변해 왔는지 비교한다.
세금은 단순한 '돈'이 아니다. 그것은 땅·노동력·생산물·신분이 얽힌 사회 구조 그 자체였다. 누가 세금을 면제받았는지, 누가 더 많은 부담을 졌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그 시대의 권력 구조가 드러난다.
▲ 전근대 수취의 네 차원 — 세금은 곧 사회 구조
고대 한국의 수취 체제는 중국 당의 조용조(租庸調) 체제를 받아들여 정비되었다. 토지에서 곡식(조)을, 사람에게서 노동력(용)과 특산물(조)을 거두는 3대 세목의 구조이다.
① 조(租, 田租)는 토지에 부과되는 곡식세였다. 통일 신라는 수확량의 1/10을 거두었다. ② 용(庸, 役)은 16~60세 남자에게 부과되는 노동력 의무로, 군역과 요역(축성·도로·궁궐 공사)으로 나뉘었다. ③ 조(調, 貢)는 호(戶) 단위로 부과되는 특산물세였다. 비단·삼베·종이·각종 토산물이 대상이었다.
일본 쇼소인에서 발견된 신라 민정문서는 통일 신라의 수취 체제를 보여 주는 결정적 사료이다. 사해점촌·살하지촌 등 4개 촌락의 호구·우마·토지·뽕나무·잣나무·호두나무까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가구는 9등호제로 나뉘고, 인구는 6등급(잉(임신부)·여자·노인·소년·정녀·정 등)으로 구분되었다. 모든 것이 세금을 거두기 위한 자료였다. 신라가 얼마나 정밀한 행정 국가였는지를 알 수 있다.
고려는 관료에게 토지의 수조권(收租權)을 분배하는 전시과 체제를 운영했다. '땅(田)'과 '땔감을 채취할 산림(柴)'을 함께 지급한다 하여 전시과라 한다.
① 시정전시과(976, 경종)는 인품과 관품을 모두 고려하여 토지를 분배했다. 자의적 요소가 강했다. ② 개정전시과(998, 목종)는 인품을 배제하고 오로지 관품 18등급에 따라 분급했다. ③ 경정전시과(1076, 문종)는 현직 관료에게만 지급(전·현직 모두 → 현직만)하고, 무관 차별을 완화했다. 이는 토지 부족이 심해지면서 지급 대상을 좁힌 결과였다.
전시과 외에도 다양한 특수 토지가 있었다. 공음전(功蔭田)은 5품 이상 고위 관료에게 세습되는 토지로, 음서제와 함께 문벌 귀족 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공해전은 관청 운영비, 군인전은 직업 군인, 외역전은 향리에게 지급되었다. 한편 왕실 운영을 위한 내장전도 있었다.
고려의 수취 체제에서 가장 가혹한 부담을 진 것은 향·소·부곡(鄕·所·部曲)의 주민이었다. 일반 군현보다 세 부담이 무겁고 거주·이주의 자유도 제한되었다. 향·부곡은 농업, 소는 수공업·광업(자기소·먹소·금소·은소·철소 등) 특산물 생산을 담당했다. 무신 집권기 망이·망소이의 난(1176, 공주 명학소)이 일어난 배경이 바로 이 차별이었다.
조선 건국 직전(1391), 이성계와 정도전은 과전법을 시행하여 권문세족의 토지를 몰수하고 신진 사대부에게 재분배했다. 새 왕조의 경제적 기반이자, 사대부 사회의 출발점이었다.
과전법(1391)은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 일대의 토지 수조권을 지급했다. 그러나 곧 토지가 부족해지자 직전법(1466, 세조)으로 현직 관료에게만 지급했고, 다시 관수관급제(1470, 성종)로 국가가 직접 조세를 거두어 관료에게 지급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결국 16세기 명종대(1556)에는 직전법마저 폐지되어, 관료들은 토지 수조권이 아닌 녹봉만 받게 되었다. 이는 양반 관료들이 사적 토지 소유(지주제)를 확대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세종(1444)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전분 6등으로, 풍흉에 따라 연분 9등으로 나누어 세금을 거두는 정밀한 제도를 시행했다. 이론적으로는 가장 합리적인 제도였지만, 실제로는 관리들의 등급 매김이 자의적이고 번거로워 16세기 이후에는 거의 최저 등급(하지하·1결당 4두)으로 거두는 관행이 굳어졌다. 영정법(1635)은 이 관행을 공식화한 것이다.
왜란·호란을 거치며 조선의 수취 체제는 무너졌다. 17~18세기 정부는 영정법·대동법·균역법의 세 개혁으로 무너진 재정과 농민 부담을 동시에 해결하려 했다. 이는 한국 전근대 세제사의 정점이다.
인조대에 시행된 영정법은 토지 1결당 4~6두로 전세를 고정한 제도이다. 이는 연분 9등법의 번거로움을 없애고 농민 부담을 경감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그러나 각종 부가세(수수료·잡세)가 늘어나면서 실질 부담은 오히려 무거워지기도 했다.
가장 획기적인 개혁은 대동법이었다. 공납(특산물세)이 ① 방납(防納) 폐단(중간 상인이 농민 대신 납부하고 수십 배 폭리)과 ② 불산공물(생산되지 않는 토산물 부담)로 가장 큰 폐단을 낳고 있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 처음 시행되고, 효종·현종·숙종을 거쳐 1708년(숙종 34) 평안·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확대되었다(100년에 걸친 시행). 핵심은 토지 1결당 미곡 12두(또는 무명·동전)로 일괄 납부하는 것. 이로써 ① 농민의 부담이 줄고, ② 선혜청이 미곡을 받아 공인(貢人)에게 청부 매입하게 함으로써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했다.
영조대에 시행된 균역법은 1년 2필의 군포를 1필로 줄인 조치이다. 군역(군 복무) 대신 베를 내던 양인들의 부담이 너무 무거워 도망·은닉이 빈발했기 때문이다. 부족분은 ① 결작(토지 1결당 2두), ② 선무군관포(양반층의 군포), ③ 어염세·선박세로 충당했다. 농민의 부담은 절반으로 줄었지만, 양반층은 여전히 군포에서 면제되어 신분제적 모순은 그대로였다.
수취 제도의 변화는 농업 기술의 발전과 함께 진행되었다. 이앙법(모내기)이 조선 후기에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① 노동력이 절감되어 광작(廣作)이 가능해졌고, ② 이모작(벼-보리)이 정착되어 생산량이 늘었다. 그러나 광작의 결과 일부는 부농이 되고 다수는 토지를 잃은 임노동자가 되는 농민층 분화가 가속화되었다. 또한 인삼·담배·면화·고추 등 상품 작물이 재배되고, 세금의 금납화가 진행되며 화폐 경제가 발달했다.
대동법·균역법·이앙법 확산은 분명히 상업과 화폐 경제를 자극했다. 일부 농민이 부농이 되고, 광작이 등장하며, 자유 임금 노동자가 늘어났다. 1960~70년대 한국 사학계에서는 이를 '자본주의 맹아론(萌芽論)'으로 정리하며, 조선이 자체적으로 근대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있었다는 가설을 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다른 시각도 강하다. ① 부농의 출현이 '자본주의'적 축적이라기보다는 지주제의 강화로 이어졌고, ② 양반층의 신분 특권이 여전했으며, ③ 외세와의 접촉 없이 자생적 산업 혁명에 이르렀을지는 회의적이라는 비판이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가 상당한 사회 변동기였다는 점은 모두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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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牧民心書)』(1818)는 정약용이 강진 유배 18년의 결산으로 쓴 지방관 지침서이다. 정약용은 농민이 무엇 때문에 무너지는지, 왜 도망가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했다.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백성을 기르는 것이라. ⋯ 군포·환곡·전세는 백성의 살을 깎는 칼이로다. 한 사람이 도망하면 그 짐이 동족·이웃에게 옮겨가니, 한 마을이 빈 마을이 된다."
— 정약용, 『목민심서』 호전(戶典) 발췌
이른바 삼정의 문란(전정·군정·환곡)은 19세기 농민 봉기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정약용의 『목민심서』·『경세유표』는 단순한 행정서가 아니라, 조선 후기 농민 사회 진단서이다.
| 구분 | 토지세(田) | 인두세·노동력(役) | 특산물(貢) |
|---|---|---|---|
| 통일신라 | 조(租): 수확량의 1/10 | 용(庸): 16~60세 남자의 군역·요역 | 조(調): 호별 특산물 |
| 고려 | 전시과 → 관료 수조권 분배 / 1/10세 | 요역 의무(향·소·부곡민 가중) | 공물(상공·별공) / 향·소의 수공품 |
| 조선 전기 | 과전법(1391)·직전법(1466) / 전분6등·연분9등(세종) | 군역(번상·번포)·요역 | 공납(상공·별공·진상) / 방납 폐단 |
| 조선 후기 | 영정법(1635): 1결 4~6두 정액 | 균역법(1750): 군포 1필로 경감, 결작 추가 | 대동법(1608~1708): 1결 12두 미곡으로 통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