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었는가, 어떻게 살았는가" — 사상은 시대의 영혼이다.
사람은 무엇을 믿고 사는가. 어떤 가치를 옳다고 여기는가. 무엇으로 죽음과 고통을 견디는가. 이 질문에 시대마다 다른 답이 주어졌고, 그 답이 한 시대의 사상과 문화가 되었다.
한국의 전근대 사상사는 ① 외래 사상의 수용, ② 토착화, ③ 새 사상으로의 분화의 반복이었다. 불교가 4세기 인도·중국에서 들어와 통일 신라·고려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고, 유교는 일찍부터 들어왔지만 조선에 와서야 성리학의 형태로 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그 성리학의 한계를 비판하는 실학, 서양에서 온 서학(천주교), 민중이 만든 동학이 등장했다.
이 단원에서는 사상의 흐름을 시대의 정치·사회·국제 교류와 연결해 본다. 한 사상은 결코 책 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것은 정치 체제를 정당화하기도 했고, 백성의 한을 위로하기도 했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무기가 되기도 했다. 토착화야말로 한국 사상사의 핵심 키워드이다.
▲ 한국 사상사의 네 흐름 — 도입과 토착화의 반복
불교는 4세기 후반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인도에서 출발해 중앙아시아·중국을 거치는 동안 여러 갈래로 분기한 이 종교는, 한반도에서 다시 토착화되어 한국 불교를 형성했다.
① 고구려: 372년 소수림왕 때 전진의 승려 순도(順道)가 불상과 경문을 전했다. ② 백제: 384년 침류왕 때 동진에서 온 마라난타가 전했다. ③ 신라: 5세기에 이미 들어와 있었으나 공인은 늦어, 527년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공인되었다. 불교 수용은 단순한 종교 도입이 아니라 왕권 강화의 도구였다. '왕즉불(王卽佛)' 사상이 부족장의 분권을 누르고 왕을 중심으로 한 통일된 권력을 정당화했다.
통일 신라의 불교는 ① 교종(敎宗)—경전 공부를 중시, 5교(열반·계율·법성·화엄·법상)—과 ② 선종(禪宗)—참선·직관을 중시, 9산—으로 분화했다. 교종은 귀족 중심, 선종은 호족·일반 백성에게 가까웠다. 원효(617~686)는 '일심(一心)'의 사상으로 종파 통합을 주장하고 화쟁(和諍)의 논리를 폈으며, 정토 신앙을 통해 불교를 대중화했다. 의상(625~702)은 화엄 사상을 정립하고 부석사를 창건, 「화엄일승법계도」를 지었다. 혜초(704~787)는 인도와 서역을 여행하고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고려는 국가 차원에서 불교를 보호했다. 팔만대장경(1236~1251)은 몽골 침입에 맞서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려 한 호국 불교의 상징이다. 사상가로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는 천태종을 창시했다(국청사). 송·요·일본에서 경전을 수집해 「속장경」을 간행한 것도 그의 업적이다. 보조국사 지눌(1158~1210)은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하는 조계종을 세우고, '돈오점수(頓悟漸修)'·'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다(송광사).
조선은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폈다. 사찰의 토지·노비를 몰수하고 도첩제로 출가를 제한했다. 그러나 ① 왕실 여성들의 후원(세조의 원각사), ② 임진왜란 시 승병의 활약(서산대사 휴정·사명대사 유정), ③ 산중 사찰의 명맥은 끊이지 않았다. 불교는 정치 무대에서 물러났지만, 민중의 종교적 갈증을 채워 주는 역할은 계속했다.
유교는 일찍부터 한반도에 들어왔지만, 지배 이념으로 자리잡은 것은 시간이 걸렸다. 신라의 국학, 고려의 성균관, 조선의 성리학에 이르러 비로소 사회 전체를 규율하는 사상이 되었다.
고구려는 372년 태학을 설립하고, 백제는 5경박사를 두었다. 신라는 신문왕 때 국학(682)을 설립해 유교 경전을 교수했고,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788)로 시험을 통한 관리 선발을 시도했다. 그러나 골품제의 제약으로 유교 이념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고려는 광종 때 과거제(958)를 도입해 유교 경전 시험으로 관리를 뽑았고, 성종 때 국자감을 설치(992)했다. 11세기 최충(984~1068)의 9재학당을 비롯해 사학 12도가 융성해 사립 교육이 발달했다. 무신 집권기 이후 잠시 위축되었다가, 충렬왕 때 안향(1243~1306)이 원에서 성리학을 들여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색·정몽주·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는 성리학을 사상적 무기로 조선 건국의 주역이 되었다.
조선 건국 직후 정도전은 「조선경국전」·「불씨잡변」 등을 통해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정립했다. 15세기에는 관학파(훈구)가, 16세기에는 사림이 등장해 정치를 주도했다. 사림의 사상적 정점에 선 두 인물이 퇴계 이황(1501~1570)과 율곡 이이(1536~1584)이다.
이황은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이(理)의 우위를 강조했다. 도덕 원리(이)와 물질(기)을 엄격히 구분하고, 인간이 도덕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입장이다. 「성학십도」를 지어 군주 교육에 힘썼고, 도산서원의 학풍은 영남학파를 형성했다. 이이는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에 가까워 이와 기의 조화를 주장했다. 현실 개혁에 적극적이어서 「성학집요」·「동호문답」 등을 통해 정치 개혁안을 제시했다. 그의 학풍은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17세기 호란 이후 조선 성리학은 예학(禮學)으로 정교화되었다(현종대 예송 논쟁: 1차 1659·2차 1674). 그러나 형식주의에 빠진 성리학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고, 17~18세기 실학(實學)이 새 흐름으로 등장했다.
조선 후기는 사상의 분기와 폭발의 시기였다. 성리학의 권위가 흔들리는 가운데 ① 내부에서 등장한 실학, ② 외부에서 들어온 서학(천주교), ③ 민중이 만든 동학이 동시에 일어났다.
실학은 ① 경세치용(經世致用) — 토지·세제 개혁 중심의 중농학파(重農派): 유형원·이익·정약용 ② 이용후생(利用厚生) — 상공업·기술 중심의 중상학파(重商派, 북학파): 박지원·박제가·홍대용 ③ 실사구시(實事求是) — 고증을 통한 국학: 김정희·안정복·정약용으로 분류된다.
특히 다산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의 집대성자로 평가받는다. 「목민심서」(지방관의 윤리), 「경세유표」(국가 제도 개혁), 「흠흠신서」(형정 개혁)의 1표 2서를 비롯해 500여 권을 저술했다. 토지 제도로는 여전제(閭田制)—마을 단위 공동 경작·노동량에 따른 분배—와 정전제(井田制)를 구상했다. 그의 사상은 근대성과 전통성을 함께 지닌 한국 사상의 정점이다.
박지원(1737~1805)의 「열하일기」, 박제가(1750~1805)의 「북학의」는 청의 신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북학론을 폈다. 박제가는 "수레와 배를 늘리면 상업이 번성하고, 상업이 번성하면 민생이 풍요로워진다"고 했다. 홍대용은 「의산문답」에서 지전설(地轉說)과 무한우주설을 폈는데, 이는 중화 중심의 세계관을 흔드는 사상적 도전이었다.
서학(西學)은 17세기 청에 다녀온 사신단을 통해 한역 서학서의 형태로 처음 들어왔다.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알레니의 「직방외기」 등이 그것이다. 처음에는 학문으로 연구되었으나, 18세기 후반 이승훈이 1784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천주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평등 사상·조상 제사 거부 등이 성리학적 사회 질서와 충돌하면서 박해가 시작되었다. 신유박해(1801)로 정약종이 순교하고 정약전·정약용 형제가 유배되었으며, 병인박해(1866)에서는 8천여 명이 처형되었다. 그러나 박해 속에서도 신자는 늘었다.
1860년 경주 출신 최제우(1824~1864)가 창시한 동학(東學)은 '서학(천주교)'에 맞서 '동학'이라 명명되었다. 핵심 사상은 인내천(人乃天) — "사람이 곧 하늘이다"이다.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본 이 사상은 신분제가 동요하던 19세기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정부는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최제우를 처형(1864)했으나, 2대 교주 최시형이 교리와 조직을 정비하고,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으로 이어졌다.
사상이 정신의 영역이라면, 문화는 그 정신이 형상화된 것이다. 한국의 전근대 문화는 인쇄술·도자기·한글이라는 세 정점에서 세계사적 기여를 했다.
고려는 세계 인쇄 문화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① 무구정광대다라니경(8C, 신라)은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물. ② 팔만대장경(1236~1251)은 8만 1,258매의 거대 목판. ③ 『직지심체요절』(1377)은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된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구텐베르크 성서(1455)보다 78년 앞섰다. 조선에서도 계미자(1403)·갑인자(1434) 등 금속활자가 발달했다.
도자기는 한국 문화의 정수다. ① 고려는 12세기 고려청자를 완성했다. 비취 빛깔의 비색(翡色)과 상감(象嵌) 기법—파낸 자리에 다른 색 흙을 채워 무늬를 만드는 기술—은 세계 도자기사의 걸작. 송 사신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고려청자의 비색을 극찬했다. ② 조선은 분청사기(15C)와 백자(16C 이후)로 옮겨갔다. 백자의 순수한 흰빛은 조선 사대부의 청렴한 미의식을 반영한다.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이 일본으로 끌려가 아리타·하기·사쓰마 도자기의 시조가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세종이 1443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한 훈민정음(訓民正音)은 한국 문화사 최대의 사건이다. 28자(현재 24자)로 모든 소리를 적을 수 있는 표음 문자이자, 발음 기관의 모양을 본뜬 과학적 문자. 「훈민정음 해례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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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東學)은 1860년 경주의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다. 서학(西學, 천주교)의 확산과 외세 침입의 위협 앞에서, "서학에 맞서는 동방의 학문"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人乃天). 사람을 섬기기를 하늘 섬기듯 하라(事人如事天). ⋯ 후천 개벽(後天開闢)의 시대가 온다."
— 최제우, 『동경대전』· 「용담유사」 종합
'인내천' 사상은 신분제 사회에서 모든 인간이 하늘과 같이 존엄하다는 혁명적 선언이었다. 최제우는 1864년 처형되었으나, 그의 사상은 2대 교주 최시형을 거쳐 동학농민운동(1894)으로 폭발한다.
| 시대 | 지배 사상 | 주요 인물 | 국제 교류 |
|---|---|---|---|
| 고대 | 불교 (왕즉불) | 원효·의상·혜초 | 중국 남북조·당의 경전 / 인도 구법(혜초) |
| 고려 | 불교 (호국) + 유교 (과거) | 의천·지눌 / 최충·안향 | 송과 천태종 교류 / 원에서 성리학 |
| 조선 전기 | 성리학 (억불숭유) | 정도전·이황·이이 | 명의 성리학 수용 / 사단칠정 논쟁 |
| 조선 후기 | 실학·서학·동학 | 정약용·박지원·최제우 | 청 사신단으로 서학·서양 천문 / 동학은 토착 |